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총신대의 문교부인가와 함께 총신과 교단은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이때 총신 인가과정에서 김인득 장로의 공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김인득 장로가 석면광산을 총신 수익 재산으로 제공하고 기부체납으로 총신에 증여하는 조건으로 문교부인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총신과 교단이 발전하게 된 인프라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정치가 신학을 보호하고 정치와 신학이 공존하였기 때문이다. 정치활동은 신학에 근거했고 신학은 정치의 보호를 받고 활동을 하였다.

이때 두 기둥이 있었는데 하나는 박형룡 박사였고 또 하나는 정규오 목사였다. 신학의 근간을 이루었던 분은 박형룡 박사였다. 박형룡 박사가 남산신학교와 총신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행정의 미스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 교단의 신학의 기초를 다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박형룡 박사를 보호해 주고 그의 신학을 마음껏 펼치게 했던 사람이 교단 실세였던 정규오 목사였다. 한 마디로 정규오가 있어서 박형룡이 존재했고 박형룡이 있어서 정규오가 존재한 것이다.

그러면 정규오 목사는 왜 이렇게 보수신학을 지키려고 했는가. 그는 태생적으로도 대쪽 성품을 가지고 태어난데다가 어릴 적부터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가 세운 교회를 다녔기 때문이다. 미남장로교 선교본부가 어떤 곳이었는가. 미남장로교 선교본부는 가장 노골적으로 앞장서서 독립운동의 정신을 고취시킨 곳이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진 폐교까지 하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곳이다. 바로 이런 신앙을 이어받은 정규오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박형룡 박사의 ‘신학난제 선평’을 달달달 외울 정도로 숙지하였으니, 신학교에 가서도 자유신학에 항거하기 위한 51인신앙동지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정규오 목사는 자연스럽게 보수신학을 신봉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9년 44회 총회 이후부터 정치적 실세가 되어 총회와 주요위원회의 서기 내지는 회의록서기를 맡았다. 그러면서 그는 항상 칼빈주의와 보수신학을 주장하였다. 몇 가지 예를 들면, 1960년 9월에 고려

측과 합동을 할 때도 정규오 목사가 서기였는데, 그가 남겨 놓은 합동위원회 원칙은 “우리는 칼빈주의 신학에 의하여 합동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원칙을 기반으로 합동을 한 것이다. 그리고 60년 12월에 발표한 선서문에도 똑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통합 측과 합동을 모색할 때도 정규오 목사는 “WCC적 운동을 전폐하고 NCC를 탈퇴하면 합동할 용의가 있다”고 하였다. 1967년 통합 측과의 합동추진을 할 때도 총회 회의록에 의하면 정규오 목사가 주도하여 합동의 원칙에 있어서 신학 문제를 이렇게 정하였다. “우리는 순수한 성경적 신학을 지키며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과 칼빈주의 전통 신학을 고수한다.”

그리고 1979년 7월에 발표한 총회가 하나 되기 위한 성명서에도 “나는 만에 하나라도 부족한 종으로 인하여 정통 칼빈주의 신학의 보수총회의 정화, 총회의 하나 되는 운동에 저해가 된다면 어떤 희생도 감수할 것이며 총노회의 봉사활동은 물론 지교회 목회 일선에서까지도 후퇴할 것을 약속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정규오 목사는 목회를 내걸고 총회의 정통 칼빈주의 신학을 지키려고 했다. 이런 보수신학의 기초 위에서 총신이 발전하고 교단이 발전했다.

물론 앞으로 정규오 목사의 정치적 과오도 언급하겠지만, 칼빈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을 지키려고 했던 정규오 목사의 노력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이처럼 정규오 목사는 철저한 보수신학 사상으로 박형룡 박사를 보호했고, 박형룡 박사는 이런 정치적 보호를 받으며 마음껏 보수신학 활동을 하게 되었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 과연 정치권에서는 얼마나 개혁신학과 신학자들을 받들고 있는가. 또 신학교 교수들도 정말 보수신학과 개혁신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있는가. 정치적, 신학적 인프라가 튼튼해야 우리 교단의 미래가 보장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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