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는 ‘주먹’ 인생서 복음사역자·독립운동가로 헌신
전국의 한센병 환자와 걸인 생존 위해 마지막까지 동행

 [성탄특집] 성탄절 사람 오방 최흥종
 

1904년 12월 25일.
양림동산에 오르는 군중들 틈에는 24세 젊은이가 끼어있었다. 망치 같던 주먹으로 이름을 날리던 최흥종, 그를 모르는 광주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도 거침없이 살아가던 인생에 무슨 이끌림이 있었는지 그는 낯선 서양인의 초대에 응해 눈 내리는 언덕길을 걷고 있던 중이었다.

유진 벨(배유지)과 오웬(오기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미국인 선교사들은 호기심을 가득 안고 몰려온 조선인들에게 예수 나신 복음을 전했다. 일찍 부모를 여읜 최흥종에게 사랑의 대명사처럼 찾아온 ’아버지’ 하나님의 이야기는, 이미 두 아이의 아빠였던 그에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아기’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이야기는 어떤 울림을 남겼을까.

이처럼 광주 최초 성탄예배 자리에 함께 있던 최흥종에게는 새로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를 복음 앞에 무릎 꿇도록 만든 것은 선교사들이 보여주는 신행일치의 삶이었다. 광주나병원을 일으킨 선교사 포사이드는 특히 최흥종의 회심과 결단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고난의 길을 위해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약한 자들의 편에서 끝까지 살았던 오방 최흥종 목사
고난의 길을 위해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약한 자들의 편에서 끝까지 살았던 오방 최흥종 목사

가족 친지조차 외면하고 질색하는 한센병 환자들을 스스럼없이 보살피는 선교사의 몸짓들을 목격하며 최흥종은 스스로가 몹시 부끄러웠고, 그 헌신 앞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참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라 확신한 최흥종은 그 놀라운 도에 몸을 맡겼다.

그로부터 강산이 세 번 변한 뒤인 1935년, 최흥종이 보낸 서신 한 통이 사람들 앞에 날아들었다. 뜯어 본 이들은 자기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멀쩡히 산 사람의 사망통지서라니.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어떤 이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나 최흥종은 죽은 사람임을 알리는 바입니다. 인간 최흥종은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나를 만나거든 아는 체를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이 지상에서 영원히 떠나 하나님 품에서 진실로 자유롭게 살 것입니다. 본인을 사망자로 간주하시고 우인 명부에서 삭제하여 주시기를 복망하나이다.”

최흥종은 이미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광주 최초의 장로이자 목회자로서 교회들을 세우고, 시베리아처럼 머나먼 오지로 찾아가 선교사 역할까지 수행하고 돌아온 그의 자질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광주 양림동에 있는 오방 최흥종 기념관 모습.
광주 양림동에 있는 오방 최흥종 기념관 모습.

독립운동가로서 최흥종의 명성 또한 이론의 여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3·1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온갖 고초를 겪고 난 뒤에도 신간회와 광주YMCA 활동을 통해 자주독립의 의지를 불태웠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의 압력에 맞서 끝까지 격렬히 저항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가 꿈꾸었던 조국 해방은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목숨 바쳐 지키고자 했던 교회는 결국 우상숭배라는 배교의 길을 선택했다. 그 참담한 현실을 견딜 수 없던 최흥종은 결국 공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만 것이다.

사망통지서 사건 이후 최흥종은 스스로를 ‘오방(五放)’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다섯 가지 얽매임에서 해방되겠다는 의미였는데, 거기에는 색욕 식욕 물욕 명예욕에 생명욕까지 모두 버리겠다는 단호한 선언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지켜야 할 모든 것을 버린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선택은 신앙의 길, 제자의 길을 처음 결단했던 바로 그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성탄절에 처음 만난 예수처럼 더 낮은 곳으로, 더 약한 자들의 자리로 찾아가는 세 번째 인생이 전개됐다.

걸인과 한센병자 어린 학생들까지 다 함께 모여 사회장으로 치른 최흥종 목사의 장례식.

전국의 한센병 환자 500여 명을 이끌고 서울로 향하며 그들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행진을 벌이기도 했던 최흥종은, 이후 음성나환자들을 위한 호혜원, 폐결핵 환자들을 위한 송등원과 무등원, 가난한 농민들을 위한 삼애학원 등을 잇달아 설립해 운영하며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들 곁에서 살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좌우세력 할 것 없이 모두가 최흥종을 원했기에 잠시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위원장으로 복귀하기도 했지만 그 자리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더 넓고 편한 길을 충분히 취할 수 있었는데도 그는 굳이 좁은 길, 십자가의 삶을 택했다.

외롭고 고단한 삶이었지만 그랬기에 최흥종은 만인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1966년 5월 14일 금식기도 중에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온 세상이 통곡으로 작별을 슬퍼했고 하늘문은 활짝 열렸다. 오방 최흥종. 그는 성탄절의 사람이었다.

최협 교수가 말하는 ‘나의 할아버지 최흥종’

“한센인들, 누구보다 슬퍼했다”
 

조부이신 오방 최홍종 목사를 추억하며, 더욱 희생하고 헌신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모습 갈망하는 최협 교수.

“제 기억에 조부님께서는 성탄절을 혈육들과 보내신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걸인 결핵환자 한센병자 등 함께 숙식하며 돌보아야 할 다른 가족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당신 스스로 베풀거나 적선하는 위치에 있다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그들의 친구가 되고자 하셨을 뿐입니다.”

최흥종 목사의 맏손자인 최협 전남대학교 명예교수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면서부터 눈이 빛난다. 별세한지 어느새 5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본인 또한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그립고 자랑스러운 존재이다.

어쩌다 손자와 함께 지낼 기회가 생길 때면 최 목사는 품안에서 삶은 달걀 같은 맛난 것들을 꺼내주곤 했다. 가족들을 살갑게 보살필 여력을 갖지 못한 그였어도, 장손을 만날 때면 애지중지해주는 평범한 할아버지로 돌아왔다.

할아버지 때문에 어린 시절 최협은 함석헌 허백련 등 당대의 인물들을, 때로는 낯모르는 한센병환자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이는 각별한 경험을 하곤 했다.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 겸 사회운동가로서 그가 가진 교분의 폭과 깊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장례식에서 확인됐다.

“정말 엄청났어요. 조문객들이 얼마나 끝도 없이 찾아오던지…. 높은 관리들부터 걸인들에, 결핵환자들까지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죠. 심지어 당시 기독교와 대척점에 있던 사회주의 노선 인사들까지 찾아와 애도를 했으니까요. 공식적으로 거행된 광주 최초의 사회장이라는데, 학교들도 휴교하며 어린 학생들이 함께 조부님을 추모했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나주 호혜원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편에 서준 고인을 떠나보내며 몹시 오열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일가처럼 상복차림을 갖춘 채 마지막까지 빈소를 지켰다. 최 목사가 성탄절을 비롯해 이 땅에서 보낸 수많은 날들을 함께 했던 바로 그들이었다.

나중에 이들은 최협 교수가 재단이사장으로 봉직하는 광주YMCA를 찾아와 최 목사의 정신을 구현하는 사업에 써달라며, 자신들이 힘들여 모은 목돈을 내놓았다. 이 기금이 바로 오늘날 오방기념사업회의 기초를 놓는 종자돈이 되었다.

오방기념사업회에서는 이를 기반으로 매년 오방아카데미와 오방학교 등의 이름으로 시민강좌를 마련하는 한편, 무명의 사회봉사자들을 위한 오방상 시상식 등을 전개하고 있다.

최 교수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지켜보면 2000여 년 전 이 땅의 낮은 데로 임하신 예수님의 길을 좇지 못 하는 게 아쉽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등산 자락 아래서 가난한 자, 병든 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사셨던 조부님은 그 가운데서 어느 누구보다도 영적인 충만함을 누리셨습니다. 그래서 죽음마저도 당당하고 평온하게 맞이하셨지요. 이런 삶을 꾸준히 보여주는 지도자들이 더 많이 등장할수록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로부터 깊은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최흥종을 더 알고 싶다면...

광주YMCA와 오방기념사업회는 광주남구청과 함께 올해 10월 ‘오방 최흥종 기념관’(광주시 남구 양림동 제중로 64/(062)654-1920)을 개관했다. 기념관에서는 오방이 광주 첫 장로이자 목사로서 살았던 신앙인의 삶, 한평생 한센병 퇴치와 빈민구제에 헌신한 운동가로서의 삶, 조국의 해방과 통일을 위해 앞장선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두루 보여준다.

고인에게 추서된 건국훈장, 백범 김구가 선물한 휘호, 3·1운동으로 투옥되었을 당시 수감자 카드, 시베리아선교사 시절 사용한 러시아어 성경, 자신의 공적인 삶이 마감되었음을 널리 알린 사망통지서 등 오방의 유족들이 소장해오던 유물들도 이 공간에 모두 모여 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인물인 만큼 시중에는 오방의 삶을 저마다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책들이 다수 나와 있다.

광주 양림동 선교역사마을에 세워진 ‘오방 최흥종 기념관’과 고인의 생애를 탐구한 도서 <오방선생 최흥종> 표지.
광주 양림동 선교역사마을에 세워진 ‘오방 최흥종 기념관’과 고인의 생애를 탐구한 도서 <오방선생 최흥종> 표지.

소설가 문순태가 최흥종의 일생을 한 편으로 드라마로 꾸민 <성자의 지팡이>(다지리), 고인과 크고 작은 추억들로 엮인 후예들이 추모의 마음을 한 데 담아 엮은 <화광동진의 삶>(광주YMCA), 영성가로서 그의 면모에 주목한 임락경 목사의 <우리 영성가 이야기>(홍성사), 목회자로서의 생애에 초점을 맞춘 최근작 <오방선생 최흥종>(바이블리더스)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12월 23일 SBS TV를 통해 방영된 <일요특선 다큐멘터리> 제161회 ‘성탄특집 오방 최흥종’ 편을 통해서도 이 땅의 약자들과 함께 한 고인의 생애를 생생한 현장보고와 증언으로 확인할 수 있다. SBS 인터넷 홈페이지나 휴대폰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무료 시청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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