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총회 부총회장)

아무리 교단이 커도 신학교가 없으면 반드시 사멸하게 되어 있다. 왜냐면 신학교는 못자리판과 같기 때문이다.

백남조 장로의 헌신으로 사당동 캠퍼스 부지를 구입하자 미 6167공병대의 협조 속에 정지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일은 미군부대에서 일해 온 김상정 전도사의 노력이 중요하게 작용을 했다.

정지작업이 끝나자 1965년 3월 15일 사당동 총신 부지에 500여 명의 축하객이 모인 가운데 기공예배를 드렸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다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그 역사적 현장을 목도하고 가장 감격스러웠던 사람은 박형룡 박사였다.

기공예배를 드리던 날, 박형룡 박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기공사를 하였다. “첫째, 천시(天時)가 왔다. 둘째, 지리(地理)를 얻었다. 셋째, 인화(人和)를 이뤘다.” 좋은 천시가 오고, 좋은 지리를 얻은 후에, 사람들의 화합을 통하여 총신을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우리 총신의 신학과 교단 신학을 세우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총신은 844평의 건물을 건축한 이후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백남조 장로는 무리한 헌신으로 기업이 부도가 나 감옥까지 가야했다. 명신홍 박사 역시 너무 무리한 미국 일정으로 71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두 분의 피와 땀과 눈물의 희생은 한국교회사에 새로운 이정표로 남을 사건이었다. 이렇게 세워진 총신으로 인해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배출되었고 한국교회가 복음의 전통 속에서 굳건하게 성장할 수 있는 틀을 다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총신의 건축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가운데 가능을 창출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당시 총신은 엄밀한 의미에서 정부의 인가를 받지 못한 신학교였다. 따라서 가장 큰 급선무는 학교 인가를 받는 일이었다. 이 일을 위해서 총신의 재단이사들은 문교부에 수차례 접촉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통사정을 하면서 온 몸으로 뛰었다. 그래서 드디어 1967년 5월 4일 <문교대1042.1-972호>에 의해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이 인가를 받는다. 그리고 6월 3일 문교부로부터 대학령에 준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 설립 인가를 받게 된 것이다.

이때 수고한 재단이사는 백남조, 김인득, 노진현, 김윤찬, 이환수, 김창인, 정규오, 정순국, 양화석, 양재열, 고성훈, 정태성, 김장호, 김처호, 곽장후 15명이 선정되었고 초대 이사장에는 백남조 장로가 선출 되었다. 또한 노회 파송 이사들 32명도 함께 수고하였다. 이들은 정치를 해도 오로지 총신 발전과 교단 발전이 목표였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우리 교단이라고 하는 가족의식과 공동체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함께 교단의 공적 사역에 올인 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개인의 사욕이나 교권욕이 거의 없었다. 서로 능력 있는 자들을 세워주고 그들로 하여금 박수치며 일하게 해 주었다. 총신은 우리 교단의 핵이 되었고 교단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되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단의 신학과 영성의 진원지가 되어 주었다. 이후에도 우리 교단에 WCC에 가입해달라는 유혹이 있었고 신신학에 대한 바람이 불어와도 우리 교단은 총신을 중심으로 보수 개혁신학을 신봉해 왔다.

오늘날 우리의 총신은 여전히 우리 교단의 핵이 되고 구심점이 되고 있는가. 우리도 우리 교단의 선진들처럼 총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우리 총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총신이 언제부턴가 정치 싸움터가 되고 교권의 각축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지금은 부끄럽게도 관선이사가 들어와 총신을 관리하고 있다. 여전히 총신은 우리 교단의 못자리판이 되어야 되고 교단의 핵과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총신을 교권의 각축장이 되지 않도록 하자. 총신이 회복되고 다시 세워져야 교단도 다시 세워질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총신과 총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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