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목사(대구 태평교회)

절망서 다시 돌아갈 기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 13:8)

김성호 목사(대구 태평교회)
김성호 목사(대구 태평교회)

마태복음 13장은 흔히 비유장이라고 불립니다. 여기에 여덟 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본문은 맨 첫 번째 나오는 비유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씨의 비유도 아니고 밭의 비유도 아닙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가라지 비유입니다. 세 번째 비유가 겨자씨 비유입니다. 네 번째 비유가 누룩 비유입니다. 다섯 번째 비유가 숨겨진 보화 비유입니다. 여섯 번째 비유는 진주 비유, 일곱 번째 비유가 그물 비유입니다. 여덟 번째 비유가 서기관 비유입니다.

여덟 개 비유 모두 짝을 이뤄 나오는데, ①첫 번째, 두 번째 비유는 천국은 끝내 승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승리자가 누구냐 하면 천국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②세 번째, 네 번째 비유는 자라나는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미비하다고 깔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이 매일, 매순간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③다섯 번째, 여섯 번째 비유의 특징은 천국의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너희 전부를 다 포기해도 될 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④마지막 두 개의 비유는 마지막에 가서 구분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비유-현재 임한 천국 비유

첫 번째 비유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흔히 이 비유를 ‘밭의 비유’, ‘마음의 비유’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비유는‘천국 비유’이고 ‘씨 뿌리는 자’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왜 천국 비유인지 한번 보십시다. 전부 다 비유 앞에 무엇이라고 붙어있습니까? “천국은…같으니”라고 합니다. 즉, 이 비유를 ‘천국’에 대한 비유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3~9절까지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비유에 대한 내용을 설명해 주십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이미 시작된 천국에 관한 말씀입니다.

도전받는 현재 임한 천국

그러나 문제는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천국이 와 있는 것 같습니까? 아닌 것 같습니까? 마태복음 10장부터 봅시다. 10장에 보면 제자들을 파송합니다.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제자들을 파송합니다.

①흔들리는 세례요한의 공동체
11장 맨 처음 나오는 사건이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엇이라고 묻습니까?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이것은 무슨 질문일까요? “당신, 메시야 맞습니까?”라는 말입니다. 누가 흔들리고 있습니까?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안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요한의 제자들마저도, 어쩌면 세례요한마저 메시아를 부정합니다. 거기에는 천국이 없는 것 같습니다.

②적대적인 바리새인 공동체
12장에 가서 24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이라고 합니다. 당시 종교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을 ‘바알세불 들린 사람이다’라 칭했습니다.

③악하고 음란한 세대
38절 말씀을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표적을 구하는데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④예수님의 가족마저도
12장 맨 끝에 무엇이 나옵니까? 예수님의 가족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도 예수님보고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쳤다는 소문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도 예수님을 잡아 가두려고 온 것입니다.(막 3:21) 어머니마저도, 자기 형제들마저도 예수를 메시아로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러 온 천국으로 보지 않고 미친 사람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주는 위로

우리가 만약 예수님의 제자였다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 노릇을 했겠습니까? 아마도 흔들렸을 것입니다. 왜요? 어디에도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다가 천국은커녕 앞으로 돌에 맞아 죽기 딱 좋을 지경입니다.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실망한 제자들을 향하여 주신 하나님의 위로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11~12장의 배경을 이해해야 실감이 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이 일상에서 보는 밭에 씨를 뿌리는 농부들의 소망을 비유로 말씀합니다. 우기가 되면 풀들이 나 자라납니다. 그러다가 건기가 오면 다 말라버립니다. 가을이 되면 밀과 보리를 뿌려야 하는데 마른 풀을 자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른 풀을 불에 태우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재가 쌓입니다. 재 밑에 있는 것이 돌인지 흙인지 보이지 않게 됩니다. 물론 가시나무 그루터기도 안 보입니다. 옛날에는 길이었지만 지금은 따로 없습니다. 사람이 다니면 그것이 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길 위에 전부 재가 쌓여 있고, 돌 위에 재가 쌓여 있고, 가시나무는 불에 타버려 없고, 가시떨기 위에 재가 쌓여 있고, 흙 위에도 재가 쌓여 있습니다.

여기에다 씨를 뿌립니다. 당시는 씨를 멀리서 밭에 흩어 뿌리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니 네 가지 밭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밭에 대한 네 가지 모습입니다. 밭이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밭의 네 모습입니다.

앞에 나오는 11~12장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의 모습, 예수님 가족들 모습, 세례요한의 제자들 모습. 이 모두가 천국이라는 밭 안에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실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뿌려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뿌리는 겁니까? 어디에 뿌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지 농부가 분명히 압니까? 모릅니다. 어디에서 가시가 날 지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재 밑의 가시나무 뿌리가 척박한 땅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돌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지금 재 밑에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어디엔가 돌이 있을 줄 알면서도 그냥 뿌려 놓습니다.

그럼에도 왜 뿌려 놓는 겁니까? 돌 위에 있으라고 뿌리는 것이 아니고 어디선가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서 나중에 곡식이 맺힐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뿌리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 믿고 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일, 그것 하나 믿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믿고 하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풍성한 결과

하나님나라는 농부가 일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교회 일을 하다가 교인들을 보고 일하면 실망합니다. 열심히 훈련을 시켜놓으면 떠나 버립니다. 다른 교회로 가버립니다. 뭘 하려고 애써 훈련시키는 겁니까?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예수님을 미쳤다고 취급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목회하기 싫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습니다.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엔가 좋은 땅은 있고, 그 좋은 땅에 뿌려진 씨를 자라게 하신다는 사실이 목회의 이유입니다.

누군가로 하여금 어디에선가 100배 60배 30배 결실을 맺히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분명히 그 결실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교회가 어렵고, 하나님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고, 한국교회가 점점 더 약해진다고 해서 실망하지 맙시다. 그래도 하나님나라의 씨는 계속 뿌려지고, 그러면서 분명히 씨는 계속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농부들은 여러 좋지 못한 상황이 있음을 알면서도 씨를 뿌립니다. 왜냐하면 변하지 않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을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8절) 마태복음은 많은 결과를 낸 것부터 썼습니다.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라고 아주 큰 것부터 이야기 했습니다. 왜 그렇게 썼을까요? 실망하지 말라고, 하나님나라는 분명히 승리한다고, 하나님나라는 분명히 완성된다고, 하나님나라는 분명히 그 뜻을 이루고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는 의미로 쓴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거역하는 자들만 바라보지 말고 끝내 옥토에서 맺힐 그 아름다운 결실을 바라보라는 교훈입니다. 그 결실을 바라보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일하는데 절대로 실망하지 맙시다. 제자들을 위로하는 그 말씀은 1세기에 있었던 마태복음을 받은 공동체를 향한 말씀이었으며, 오늘을 살아가며 교회를 염려하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위로를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끝내 완성될 하나님나라의 큰 승리를 바라보면서 위로를 얻읍시다. 오늘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최선을 다하여 충성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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