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조선인 곁을 지킨 헌신의 삶 빛나다
인재 양성·독립운동에 열정적 활동 … 한글 성경번역 사역에 힘쓰던 중 선박 사고로 순교

“그는 조선을 돕다가 죽었소. 그를 이리 불명예스럽게 죽게 해선 안 된단 말이오.”(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에서)

①한국의 첫 감리교 선교사로 사역하다 순직한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②아펜젤러 선교사가 서재필 윤치호 등과 제작 편집을 함께 한 독립신문. ③양화진외국인묘원에 조성된 아펜젤러 선교사의 묘역. ④아펜젤러가 숨진 어청도 해상 인근에 세워진 군산 아펜젤러순교기념관과 서천 마량진 해변의 추모비. ⑤아펜젤러가 삼문출판사를 통해 출간한 한글 누가복음과 아펜젤러 전기.
①한국의 첫 감리교 선교사로 사역하다 순직한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 ②아펜젤러 선교사가 서재필 윤치호 등과 제작 편집을 함께 한 독립신문. ③양화진외국인묘원에 조성된 아펜젤러 선교사의 묘역. ④아펜젤러가 숨진 어청도 해상 인근에 세워진 군산 아펜젤러순교기념관과 서천 마량진 해변의 추모비. ⑤아펜젤러가 삼문출판사를 통해 출간한 한글 누가복음과 아펜젤러 전기.

이미 물이 허리까지 차오르는데 그는 떠날 생각을 안 했다. 침몰하는 뱃속에서도 자신의 목숨보다 조선인들의 목숨을 지키는 게 더 우선인 것처럼 보였다. “빨리 나오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일행의 간곡한 외침조차 소용이 없었다.

1902년 6월 11일 오후 2시 미국북감리회 소속의 선교사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는 제물포에서 출항하는 일본 선박 쿠마가와마루호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그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먼 여행길에 자신의 한국어 어학선생이자 성경번역 일에 동역해 온 조사 조한규와 정신여고에 재학 중인 목포 출신의 여학생 하나가 동행했다.

17년 전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딛은 이후 한글 성경번역은 아펜젤러가 가장 열정을 쏟은 사역 중 하나였다. 아펜젤러가 도착하기 전, 조선인들은 이미 자기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만주에서 활동하던 로스 선교사가 번역한 이 성경은 이북 사투리가 워낙 심하게 섞여있어 보편적인 사용이 어려웠다.

아펜젤러는 1890년 ‘대한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 회장으로 취임하며, 앞서 자신이 설립한 삼문출판사를 통해 누가복음을 출간한 것을 시작으로 성경출판과 번역 그리고 보급에 열을 올렸다. 더 많은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달하고 싶었던 그의 열망은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성경번역자회’를 결성하는 성과를 냈으며, 마침내 1900년 한글 신약전서가 완성됐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아펜젤러 친필 일기.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아펜젤러 친필 일기.

그의 활동은 복음사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일제의 노골적 침탈이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분노를 느낀 그는 조선인들의 편에 서기로 결심했다. 고종황제가 하사한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젊은 인재들을 키우는 교육 사업에 헌신했고, 일제의 노골적인 침탈에 맞서 이상재 이승만 등 조선인 선각자들이 독립협회를 결성할 때도 큰 힘을 보탰다. 서재필 윤치호와 함께 독립신문을 제작 발간하는 일에도 함께 했다.

그는 마음이 급했다. 신약전서 출간 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안식년 휴가를 떠났지만, 혼자서 먼저 조선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부친상을 당했지만 돌아갈 수가 없었다. 조선인들이 국권을 지킬 수 있도록 부지런히 도와야 했고, 남은 구약성경 번역 작업도 속히 마무리해야 했다. 목포로 가는 뱃길은 그 목표를 향한 새로운 여정이었다.

하지만 그 여정은 시작부터가 순탄치 않았다. 당초 한 주 전에 출발했어야 할 이 여행은 그 며칠 전 아펜젤러가 경기도 시흥의 무지내교회당 봉헌예배에 참석하러 가던 중, 일본인 노무자들과 시비가 붙는 바람에 부상을 입고 재판까지 치르는 사건이 발생해 늦춰지고 말았다. 다시 오른 여행길 또한 결국 끝맺음을 하지 못했다. 목포로 향하던 배가 밤 11시경 군산 어청도 앞 해상에서 다른 일본 선박과 충돌하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이 사고로 배는 침몰하고 아펜젤러를 포함한 승객과 선원 22명이 실종됐다.

사실 아펜젤러에게는 탈출과 생존의 기회가 있었다. 당시 사고에서 생존한 미국인 보울비의 증언에 의하면, 갑판 가까운 곳에 객실이 있던 그는 신속히 빠져나오고서도 끝내 배를 떠나지 못했다. 아래 선실에 있던 조한규와 조선인 여학생을 구출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결국 아펜젤러는 두 사람과 운명을 함께 했다.

비보를 듣고 많은 이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절친 이승만은 아예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슬픔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훌륭한 동역자이자 친구를 잃은 동료 선교사들, 조선인들이 마음을 추스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아펜젤러가 못 다한 사명을 완수할 책임이 있었다.

아펜젤러 사후 9년 만인 1911년 3월 구약전서 번역이 완성되며, 조선인들은 완성된 한글 성경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서울 정동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 헨리와 딸 엘리스는 대를 이은 선교사로 조선에 돌아와 헌신적으로 사역하다, 해방 후 대한민국이 건국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아버지를 따라 이 땅에 묻혔다. 조선인들을 최후까지 사랑한 위대한 생애는 그렇게 완성됐다.

아펜젤러의 조선을 위한 헌신
조선의 미래 준비 힘껏 돕다

장영학 목사(책향기교회.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 관장)
장영학 목사(책향기교회.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 관장)

27세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함께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우리나라에 도착했다. 이들은 모두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교회를 세우기 위해 기도하고 준비한 선교사들이었다.

아펜젤러는 1858년 미국 펜실베니아의 수더튼에서 출생하였다, 아펜젤러의 가문은 스위스에서 시작된 쯔빙글리의 전통신앙을 이어받은 집안으로, 1735년 미국으로 이민해 살기 시작했다.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아펜젤러는 부모님의 신앙을 따라 개혁교회에서 믿음생활을 하였으며, 1877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한 학기동안 교사 생활을 하였다. 1878년에는 펜실베니아 랭케스트에 있는 프랭클린마샬대학에 입학하면서, 그 지역에 있는 랭케스트제일감리교회에 출석하며 감리교인이 되었다.

1882년 대학 졸업 후, 소명을 가지고 그해 가을 감리교 계열의 뉴저지 소재 드류신학교에 입학하여 1885년 1월 졸업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인 1884년 12월 17일 엘라 닷지양과 결혼한 후 조선의 선교사로 갈 준비를 하였다. 1885년 2월 2일에 선교사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바로 다음 날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2월 27일 일본에 도착했다. 일본 주재 선교사들을 통하여 잠시 조선의 정보를 듣고 선교 준비를 한 후, 3월 31일 일본 나가사키를 떠나 4월 2일에 부산에 도착하였으며, 1박 후 다시 배를 타고 제물포로 갔다.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의 여파로 치안이 불안했고, 외국인 여성이 들어와서 활동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를 감안하여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6월 20일 제물포로 재입국하였으며, 7월 29일 서울에 도착하여 정동에 자리 잡고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아펜젤러는 그해 12월 정동감리교회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정동에 구입한 한옥에서 배재학당을 개교해 조선을 이끌어갈 인재들을 양육하기 시작했다.

특히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열중하여 1890년 로스역 성경 개정판인 <누가복음젼>을 출판하고, 다시 1892년에는 <마태복음젼>을 출판하였다. 1893년 언더우드 선교사를 비롯한 다섯 명이서 성경번역자회를 구성하였으며, 1894년에는 종로에 기독교서점을 개설하고 운영하기 시작했다. 1900년에는 성경번역자회에서 신약성경을 출판하여 출판감사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아펜젤러는 1902년 5월 평양에서 열린 연회에서 조선 남부지역 감리사로 임명을 받았으며, 그해 6월 1일 관할 지역인 시흥의 무지내교회 성전 봉헌식에 참석하기 위해 무어 감독과 함께 가던 중 경부선 철도공사 현장에서 일본인 철도 노무자와 마찰이 생겼다.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지체하다가,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에 참석하기 위해 6월 4일 예약해 둔 제물포에서 목포로 가는 배를 타지 못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6월 11일 아펜젤러는 자신의 조선인 어학선생 조성규와 함께 다음 배편에 올랐다. 그러나 그날 밤 11시경 이 배는 군산 어청도 앞바다에서 선박 충돌사고를 당하고, 아펜젤러는 44세 나이로 순직한다.

아펜젤러는 선교사로 사역하는 한편, 조선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배재학당을 중심으로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또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을 도와 구국운동에 적극적인 후원자 및 지도자 역할을 했다. 서재필 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편집하는가 하면,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힌 이승만을 돕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흥우를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의 모임인 협성회를 통하여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민주주의를 꿈꾸게 하였으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분을 가지면서 국운이 기울어가는 조선을 다시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펜젤러 자취를 찾아

덕수궁 옆 정동길을 거닐다보면 아펜젤러의 숨결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특히 정동제일교회(서울시 중구 정동길 46/(02)753-0001)는 신축예배당 1층에 아펜젤러기념박물관을 건립해 생전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각종 기록 등 한마디로 아펜젤러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고인이 번역한 최초의 신약성경, 휴대하고 다닌 성찬기 등도 전시되어 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1길 19/(02)319-45578)에도 아펜젤러의 친필일기와 함께 고인이 배재학당 우물 사용과

관련해 고종 황제에게 보낸 진정서, 독립운동 중 수감되어 있던 이승만과 주고받은 편지 등을 소장하고 있다. 아들인 헨리 닷지 아펜젤러가 미국서 들여온 1911년 독일산 그랜드피아노는 일명 ‘아펜젤러 피아노’라 불리며,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480호로 지정됐다.

양화진외국인묘원(서울시 마포구 양화진길 46/(02)332-9174)에는 고인의 묘소와 함께, 대를 이어 한국선교사를 지낸 장녀 엘리스와 장남 헨리의 묘소도 마련되어있다. 아펜젤러가 사고로 숨진 어청도 바닷가에는 군산 아펜젤러순교기념교회(군산시 내초안길 12/(063)467-2478·사진)와 서천 아펜젤러순직기념관(서천군 서면 서인로225번길 61/(041)952-1885)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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