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과 휴가가 있는 여름은 다양한 가족체험이 가능한 시즌이기는 하지만, 더위와 잦은 비 때문에 야외나들이에는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폭염이 한 풀 꺾인 요즈음이 가족 단위의 견학이나 탐방에 도전하기에는 오히려 제격이다. 더구나 3·1절 100주년이라는 역사적 시점에다, 광복절을 보낸 지 얼마 안 된 즈음이다. 이번 주말에는 자녀들과 함께 일제강점기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한 몸을 바친 인물들의 애국신앙을 되새기는 역사기행을 떠나보자. <편집자 주>

도산공원에 건립된 도산안창호기념관 전경.
도산공원에 건립된 도산안창호기념관 전경.

도산공원

안창호는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대표적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중 한 사람이다. 민족의 실력을 기르기 위해 신민회와 흥사단 등을 세웠고,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등 요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평안남도 강서 출신인 그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운영하는 구세학당(경신학교)에 입학해 3년 동안 수학하면서 기독교에 입문했으며, 이승만 윤치호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근대학교인 점진학교와 대성학교를 세워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일에도 힘썼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1909년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9년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다시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파사건 당시 다시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었으며, 이후 연달아 옥고를 치르며 병을 얻어 1938년 순국했다.

안창호의 호를 딴 도산공원은 1973년 고인의 애국정신과 교육정신을 기리고자 공원으로 조성됐다. 도산공원에는 안창호와 부인 이혜련 여사의 묘소, 동상, 기념관, 말씀비, 체육시설 등이 들어서있고, 매년 3월 10일 흥사단과 도산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추모기념행사가 열린다.

특히 도산안창호기념관(02-541-1800)에서는 안창호의 생애 및 고인이 남긴 서한과 연설문 등 각종 유물 등을 살필 수 있다. 도산공원은 지하철 분당선 압구정로데오역 5번 출구나, 3호선 압구정역 3번 출구로부터 도보로 10분 거리에 위치한다.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45길 20)

 

김마리아기념공원

김마리아가 태극기와 독립운동 관련 문서들을 숨겨둔 옛 정신여고 회화나무.
김마리아가 태극기와 독립운동 관련 문서들을 숨겨둔 옛 정신여고 회화나무.

김마리아는 2·8 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과 미국 등지에서까지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신학자와 교육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황해도 장연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김마리아는 1906년 상경해 이화학당과 연동여학교(현 정신여중고)에서 수학한 후 광주 수피아여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1914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1919년 일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 가담해 현장에서 연설자로 나서고, 곧바로 국내로 들어와서는 독립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며 전국적인 3·1운동 개시에 불을 지폈다.

그해 3월 5일 모교인 정신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에 동참했다가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으로 병을 얻고 평생을 고생했다. 이후에도 임시정부 활동을 돕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서다 고문 후유증이 재발해 1944년 순국했다.

김마리아의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서울시 송파구 올림픽로4길 16)에는 김마리아회관과 기념상이 건립되고, 예장통합 여전도회관(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190)에도 김마리아기념관이 마련되어 고인의 삶과 신앙을 기리고 있다.

올해 5월 24일에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정신여고 옛 터이자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활동 거점이었던 현 서울보증보험 본사 사옥에 김마리아의 흉상이 세워졌다. 이곳에는 김마리아가 태극기와 독립운동 관련 비밀문서를 숨겨두었던 회화나무가 남아있으며, 야외공원과 계단길 등에 고인의 생애를 소개하는 작은 공원이 마련됐다. 종로5가역 1번 출구에서 5분 거리에 있다.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29)

 

월남 이상재 생가

월남 이상재 생가터에 건립된 고인의 동상.
월남 이상재 생가터에 건립된 고인의 동상.

이상재는 독립협회와 신간회를 창립하고 항일운동에 헌신한 민족지도자로, 호는 월남이다.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와 조선교육협회장 등으로 지내며 기독교사회운동과 민족교육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충남 서천 출신인 이상재는 1896년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문 건립과 독립신문 발간 등을 통해 국민계몽에 앞장선 인물이다. 정부의 무능을 성토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체포되어 옥중생활을 하는 동안 예수를 믿게 됐고, 이후 YMCA를 기반으로 청년들의 구국활동을 이끌었다.

3·1운동 당시에도 배후로 지목되어 수감생활을 했으며, 일제의 탄압과 회유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소년척후단(현 보이스카우트) 초대총재와 신간회 초대회장 등을 역임하며 민족지도자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1927년 숨진 그의 장례식은 서울에서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무려 10만 명의 추모객이 운집해 고인의 죽음을 애석해했다.

이상재의 생가는 1990년 충청남도 시도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었으며, 가옥과 담장 등이 복원되고 기념관이 세워져 탐방객을 맞는다. 기념관에는 고인의 유품들과 대표적인 어록 등을 관람할 수 있으며, 이곳에서 서울YMCA 주관으로 매년 추모행사가 개최된다.

고속도로 동서천IC에서 자동차로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주변에는 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 시절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임시정부 의정원장을 지낸 김인전 목사의 생가와 기념공원도 조성되어있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단길 71)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