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정치하는 곳’ 관행과 집단화된 정치모임이 개혁 흔들어
교단 질서 확립과 존중의 문화 정착 시급 … 생각 바꿔야 ‘회복’

교단 변화 행보 발목 잡는 ‘고정관념의 닻’을 끊어라

<기독신문>은 교단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총회를 앞두고 교단의 고질적인 적폐를 고발하며 변화와 개혁을 촉구하는 기획을 매년 싣고 있다. ‘교단기획’은 기자들이 1년간 현장을 누비며 듣고 기록한 교단 구성원들의 목소리와 바람을 압축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100회 총회를 앞두고 ‘100회 총회, 교단개혁 골든타임이다’는 기획시리즈로 ‘100회’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모멘텀 삼아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교단개혁에 앞장설 것을 강조했다. 이 기획에서는 법 지식과 언론과 위력 등을 동원해 불합리한 이득을 취하는 소위 ‘해결사’들의 사례를 낱낱이 고발하면서 공정하고 투명한 교단을 세우기 위해서는 해결사를 해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울러 돈이면 만사가 해결되는 행태도 구체적으로 꼬집었다. 
제101회와 제102회 총회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총회 100년, 기본부터 다시 세우자’ ‘교단 리빌딩 고삐를 당겨라’를 주제로 기획했다. 거대공룡화되고 있는 교단의 비효율적 현실을 분석하고, 미래 청사진을 그리는 생산적인 교단의 틀을 구축할 것을 강조했다. 
이어 제103회 총회를 앞두고 실시한 기획 주제는 ‘변화, 인(人)제(制) 혁신으로 완성된다’였다. 극도로 정치화된 교단 현실을 직시하고, 비효율·비생산적인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인적 쇄신과 함께 사람이 바뀌어도 변화와 개혁의 동력을 이어갈 수 있는 제도 구축이 필요하다는 당위성을 공유했다. 그렇다면 구성원들의 바람대로 교단이 혁신을 이뤄냈으며, 손에 잡히는 변화를 이끌어냈을까.   <편집자 주>

개혁? ‘말짱 도루묵’

교단의 변화와 개혁은 어느 회기나 화두였고, 간절한 바람이었다. 특히 1년간 교단을 이끌 총회장들은 어느 누구보다 교단을 개혁하고 발전적인 토양으로 바꾸려는 의지를 보여 왔다. 애석하게도 교단이 보여주고 있는 습성을 보면 변화와 개혁은 미사여구 내지는 한낮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이유는 분명하다. 구습의 답습이다. 변화하는 시대에 개혁신앙에 근거한 대안을 제시하는 도전의식은 전무하고, 관료의식에 사로잡혀 새롭거나 생산적인 결과물들을 내놓지 못하는 실상은 해마다 반복되고 있다. 무의미한 회의와 행사의 반복은 변화를 동력화하지 못하거나 의욕을 꺾어버리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 부분에서 근본문제는 구태의연한 생각 때문이다. 

또 다른 개혁의 발목잡기는 의도적 힘빼기와 갈등과 혼란을 부추기는 정치개입이다. 의도적 힘빼기는 자신의 뜻과 요구가 반영되지 않는다고 소송을 제기하거나, 총회결의 시행을 위해 협업으로 이뤄내야 할 사안임에도 협력하지 않고 버티기로 나서는 모습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분쟁 교회와 노회 당사자들이 총회회관에서 거칠게 항의하며 자신들의 의지를 피력하는 모습도 연례행사처럼 있어 왔다. 103회기 들어 이런 모습이 크게 줄어들어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부당한 정치개입으로 혼란을 더 부추기는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교단 내 특정 유력 정치인의 전횡, 편향된 법 논리와 완력을 앞세워 본질을 호도하여 사태를 더 어지럽히는 브로커들의 활개, 최근 들어서는 유튜브·SNS·언론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여론몰이로 검증되지 않은 사실의 사실화 등으로 실체적 진실 접근과 공명정대한 집행을 막는 일이 더욱 심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총회서기를 지낸 서현수 목사 역시도 교단 개혁의 걸림돌로 관행과 집단화된 정치모임의 과도한 정치개입을 꼽았다. 서 목사는 “총회임원을 하면서 원칙을 세우는 일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경험했던 부분이 관행과 집단화된 정치모임이었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지 않으면 개혁의 구호는 화려하지만 언제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총회는 정치하는 곳은 맞다. 그러나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정치하느냐는 질문에, 현재 교단 실상이 주는 답은 무엇일까? 미래지향적이고 생산적인 총회, 변화와 개혁을 이루는 총회를 기대하지만, 번번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이유는 총회에 대한 왜곡된 생각 때문이다. 금권선거가 판을 치고, 명백한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정치적으로 풀어야한다는 말로 본말을 전도시키는 행태야 말로 왜곡된 생각에 기인한 현상들이다. 총회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진정한 변화와 개혁의 행보를 내딛을 수 있다.
총회는 정치하는 곳은 맞다. 그러나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정치하느냐는 질문에, 현재 교단 실상이 주는 답은 무엇일까? 미래지향적이고 생산적인 총회, 변화와 개혁을 이루는 총회를 기대하지만, 번번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이유는 총회에 대한 왜곡된 생각 때문이다. 금권선거가 판을 치고, 명백한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정치적으로 풀어야한다는 말로 본말을 전도시키는 행태야 말로 왜곡된 생각에 기인한 현상들이다. 총회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진정한 변화와 개혁의 행보를 내딛을 수 있다.

‘정박효과’ 작동하는 총회

변화와 개혁이 언제나 과제로 머물러 있는 교단현실에서, 작은 것 하나를 바꾸기란 결코 쉽지 않다. 바로 저항 때문이다. 이미 몸에 밴 범주를 바꾸면 수혜를 누리던 세력이 배제되기에 저항이 만만찮다. 이 저항을 극복하지 못하다보니 마냥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총회’라는 존재가치의 왜곡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정박효과)라는 말이 있다. 배가 닻(anchor)을 내리면 닻과 배를 연결한 밧줄의 범위 내에서만 움직일 수 있듯이, 처음에는 인상적이었던 숫자나 사물이 기준이 되어버려 이후 판단에 왜곡 또는 편파적인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의미하는 단어다. 처음 각인된 것에 고착화되어 새로운 것을 수용않거나 부분적으로만 수정하는 정박효과는 이미 실험을 통해 통용되고 있는 현상이다.

총회가 딱 그렇다. 총회하면 정치하는 곳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다. ‘총회=정치하는 곳’이라는 말에는 긍정보다는 부정의 의미가 짙다. 부정과 불의도 적당한 타협으로 묻을 수 있는 곳, 온갖 추잡한 금권선거도 으레 그런 곳이라고 치부하는 현실이 이를 잘 방증한다. 그저 자신이 목표한 자리, 자신의 정치영역이 훼손되지 않으면 변화와 개혁에는 안중에도 없는 소아적인 정치만 난무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교단의 정치시스템을 조금이라도 읽어내는 소수의 정치꾼에 의해 교단 분위기가 좌지우지 되는 서글픈 현실을 답습하고 있다. 

변화와 개혁은 제도 개선과 인적 쇄신으로 완성된다. 하지만 변화의 필요성과 방향성을 인지하는 ‘생각’이 교단 전반의 DNA로 자리 잡히지 않으면 변화는 좌초하거나 동력을 얻을 수 없음은 이미 체득한 사실이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변화와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단 구성원들이 ‘총회’라는 생각의 틀을 선행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생각은 행동을 만들고, 반복된 행동은 습관을 만드는 것이 인간사이듯, 총회에 대한 생각을 바꿀 때 새로운 교단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다.

정박효과 극복할 좌표 설정하라

정박효과가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 총회현실에 대해 교단을 이끄는 현 총회장의 생각은 어떨까. 이승희 총회장은 “교단의 질서 확립과 존경의 문화 정착이 시급하게 필요하다”라고 강조한다. 이 총회장은 “총회임원직을 수행함에 있어 소송으로 협박하거나 음해성 유언비어를 살포하는 등의 막장문화가 근절돼야 한다”며 “이는 궁극적으로 교단 위상추락과 불신만 야기할 뿐이라는 인식을 가질 때 비로소 바른 질서를 세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총회장을 비롯해 총회임원 3명이 모 인사에 의해 최근 사법에 피소되어 가처분소송에서 승소한 직후, <기독신문>에 총회임원 명의로 입장을 표명한 부분을 언급하며, “이를 통제할 어떠한 권한도 없어 소극적 차원의 대응밖에 할 수 없는 형편이라, 이를 악용하는 세력들로 인해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라 토로했다.

총회장을 지냈던 다수의 증경총회장들도 한정된 총회임원 권한으로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추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고 한다. 원인은 현실적으로 1주간의 총회에서 수임된 사항만 집행하는 구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금의 총회는 민감한 정치사안 외에 신학 교육 목회 교단청사진과 관련한 심도 있는 논의가 실종한 지 오래다. 그저 관련 상비부나 특별위원회에 이관해 버리기 일쑤다. 교단 산하 교회들이 직면한 위기적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알면서도 총회구조상 정책적 대안을 도출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을 할 수 없는 구조다. 온통 정치쟁점에만 함몰된 부작용 때문이다.

이처럼 교단에 잠재되어 있는 정박효과를 극복하지 않고는 ‘회복’을 기대하는 제104회 총회도 구습의 답습, 부정을 용인하는 치리 실종, 왜곡된 정치가 판을 치는 총회가 될 수밖에 없다. 정치와 부정이 난무한 총회가 아닌 정책과 대안이 있는 생산적인 총회가 되기 위해서는 1600명에 달하는 총회총대 전원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 총회는 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고 세우는 정치를 하는 곳이라는 생각, 쟁점이 아니라 정책에 더 관심을 갖겠다는 생각을 가질 때, 교단은 마침내 변화와 개혁의 실질적인 한 걸음을 내딛게 된다.

따라서 3회에 걸쳐 진행하는 이번 기획은 정박효과를 가중시키는 부정적 현실을 신랄하게 고발할 예정이다. 거울에 반영된 모습에서 삐뚤어진 부분을 바로잡듯이, 현교단의 민낯을 보게 하는 거울이 되기 위함이다. 금권선거를 당연시 여기는 교단문화는 누가 만들었으며, 온갖 부정과 불법에도 일말의 수치심조차 실종된 교단으로 만든 것이 무엇인지 이번 기획에서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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