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근 목사(삼일교회)
송태근 목사 (삼일교회)

현실 없는 이상은 공허하고, 이상 없는 현실은 맹목이 된다.
현실과 이상의 균형은 국가는 물론 공동체의 정체성을 좌우한다. 교회도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는 성경을 토대로 하는 공동체이다. 이 성경을 기초로 한 이상이 사라지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로서의 기능과 가치를 잃는다.

반면, 교회의 이상을 다음 세대와 공유하는 것, 다시 말해 교회교육은 시대마다 변해왔다. 모세가 신명기에 강조했던 교육은 초대교회나 종교개혁 시대를 거쳐 오면서 언제나 성경을 토대로 하지만 현실적 ‘방법’은 조금씩 달랐다.

모세가 강조하던 ‘하브루타’로 대변되는 ‘토론’, 초대교회에서 행해지던 암송과 낭독, 종교개혁 시대의 그림과 음악은 이상을 현실화하려는 다양한 방법들이었다. 따라서 교회교육에 그림과 음악, 문학이 옳은가 하는 것은 우문(愚問)이다. 왜냐하면 문맹들을 위해 우화로 성경교육을 시도했던 <천로역정>이나 루터의 종교개혁을 그림으로 그렸던 크라나흐(Cranach)의 그림은 <성경>을 교육이라는 목적으로 표현한 수단들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종교개혁의 후예들이라는 서구의 주일학교 교육에는 성경교육이 붕괴된 채 그림 그리기 같은 활동만 남았다. 교회교육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림, 음악, 예술은 성경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며, 교회교육의 목적은 ‘성경’을 가르치는 데 있다.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다음 세대 인구가 급격히 줄어가는 현재, 교회교육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세우는 것은 향후 100년을 좌우할 중차대한 일이다. 요즘 교회교육을 살펴보면 목적은 사라지고 수단만 남았다. 30년 전과 비교했을 때, 공과공부 교재의 표지는 화려해졌고, 찬양은 다양해졌다. 그러나 공과공부 교재 속에는 ‘윤리’만 남았고, 찬양 속에는 ‘복음’이 사라졌다. 강습회에는 레크리에이션과 다양한 활동, 교수법 같은 수단이 전달될 뿐 성경을 교육하기 위한 고민들이 사라진 현상들은 필자의 기우(杞憂)이기를 바란다. 목적과 수단의 적절한 균형과 고민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다.

교회사를 보면 위기의 순간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순간과 동일한 의미였다. 가톨릭 세력이 극에 달할 때, 종교개혁자들은 52주 성경교육을 위해 ‘교리문답’을 만들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독일과 영국이 영적으로 가장 암울할 때 탄생했다. 문맹의 민중들을 교육하기 위해 ‘찬송가’가 작시되었다. “주 예수 내가 알기 전”이라는 압축된 찬송가 가사에 엄청난 ‘예정론’이 담겨 있고, 그 시대의 찬송가에는 깊은 신학이 녹아 있다. 종교개혁 화가들이 그린 그림은 ‘눈으로 보는 설교’였다. 영국의 가장 암울한 시기에 성경책을 통해 문맹을 극복하려는 역발상에서 “주일학교”가 태어났다.

고로 현재의 위기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시간임을 믿는다. 이런 시기일수록 ‘성경’이라는 ‘본질’을 목적으로 삼고, 우리의 모든 역량을 ‘수단화’해서 방법을 만들어내야 한다. 방법이 없는 본질은 공허하고, 본질이 결여된 방법은 맹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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