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서 활동영역 넓히는 일에 힘 모으자”

열악한 현실에도 교단 권위 순응하며 선교와 동창회 적극 참여

유순화 전도사는 여전도사로 평생을 살아왔다. 교회와 더불어 선교회에서 젊음을 바쳤다. 여성사역자로 사는 것 자체가 벅찬 순간이 많았지만 그는 당당하고자 했다. 유 전도사가 후배 여동문들에게 교단 내에서 활동의 범위를 넓혀나가자고 당부하고 있다.
유순화 전도사는 여전도사로 평생을 살아왔다. 교회와 더불어 선교회에서 젊음을 바쳤다. 여성사역자로 사는 것 자체가 벅찬 순간이 많았지만 그는 당당하고자 했다. 유 전도사가 후배 여동문들에게 교단 내에서 활동의 범위를 넓혀나가자고 당부하고 있다.

유순화 전도사는 총신신대원 여동문 시니어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오랫동안 국제선교회 AIM에서 일하면서 세계복음화를 위해 헌신했고, 교회에서 여전도사로서 사역했다. 남성들이 절대다수인 총신신대원 총동창회에 나가 꾸준히 활동했고 총신여동문회를 이끌어온 숨은 리더였다. 지금은 예장고신 총회회관에 있는 한마음교회의 담임전도사로 사역하고 있다. 일평생 성도들을 섬겼고 상담과 구제로 낙심한 이들을 일으켜 주는 역할을 했다.

▲소개를 부탁한다

=총신대신학대학원에 1980년에 입학했으며 서울의 C교회 전도사, AIM국제선교회 대표 등을 거쳤다. 지금은 한마음교회 담임전도사로 사역하고 있다. 1995년 아프리카 단기선교를 5개월 다녀왔는데 탄자니아를 방문했을 때 소나기가 왔다. 비가 그친 뒤 나가보니 한 마을이 없어졌다. 이 충격적인 모습을 보고 나는 열악한 삶에 예수님까지 모르고 죽어가는 이들이 없도록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선교에 헌신하게 된 시작이었다.
1990년대만 해도 국내선교단체는 미약했다. 해외선교, 특히 아프리카나 공산권에 선교사를 보내려면 국제선교단체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나는 AIM선교회 총무, 원장대리, 대표 등으로 13년을 사역했다. 선교회를 시작할 때 넘겨받은 것은 단돈 5만원과 선교사 3명이었지만 지금은 33명의 선교사로 성장했다. 숫자가 타선교단체에 비해서 적은 것은 AIM의 파송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해외선교 뿐만 아니라 국내 선교동원 사역에도 과거에는 국제선교단체의 영향력이 컸다. 전국을 다니면서 선교동원을 위해서 세미나를 하고 선교수련회를 인도했다. 그 이후 2008년 AIM 선교회에서 물러났고 2010년 한마음선교회를 세웠다.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해서 어디를 가든지 본이 되고 복음을 전하는 일꾼을 길러내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사역을 하시면서 기억나시는 일은

=청년들 밥을 먹인 일이 기억난다. C교회 전도사 시절 직장청년부를 담당했는데 고향을 떠나서 공장에서 일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퇴계로 4가나 종로 등 시장근처에 공장들이 많았는데 청년들이 거기서 일했고 밤에는 공장에서 마련해 준 좁은 방에서 열명씩 쪽잠을 잤다. 그들은 토요일 오후까지 일하고 주일에는 교회에 와서 밥해먹고 철야기도하고 월요일 공장으로 돌아갔다. 청년들은 배가 고프다고 했고 어떤 청년은 일이 힘들고 인간대접 못받는다고 죽겠다고 했다. 그들을 먹이고 위로했고 한편으로 공장을 다니면서 사장들을 상대하면서 전도를 열심히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 옛날일이다. 그때 배고픈 청년들은 있었지만 그만큼 신앙에 대한 열정과 간절함도 컸다.

AIM선교회 활동 중에도 어려운 청년들과 선교사후보생들에게 물질을 나누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일을 했다. 구제품이 들어오면 나누어 입히고 선교사후보생들과 함께 살고 함께 전국을 누비면서 “아프리카로 가자”고 외쳤다. 지금 한마음교회를 목회하면서도 비록 넉넉하지는 않지만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간구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다면 돕고 있다. 인생을 살다보니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려야 할 때가 적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 전도사 시절 주일 저녁예배를 마치면 선후배 여전도사들이 기도원으로 가는 버스를 먼저 타려고 뛰었다. 주일날 하루 종일 교회에 있어서 피곤했지만 기도원에 올라가서 밤새 기도하고 새벽에 내려왔다. 기도실보다 카페가 우선인 시대가 됐지만 기도를 잊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교단의 여성사역에 대해 조언하신다면

=2000년대가 되자 선교단체 대표로 여자목사들이 등장했다. 나는 목사가 아닐지라도 꿀리지 않고 일했다. 주변에서 목사안수를 받으라고 제안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교단이 통합측과 나뉠 때 합동 교단을 택했다. 우리 교단이 좋아서 교단의 권위에 순응하면서 오늘까지 왔다. 후배들 중에 여성목사 안수를 간절히 원하는 이들이 있다. 사실 나도 여러해 동안 그들과 함께 총회현장에 가서 여성목사를 허하라고 피케팅을 했다. 여동문들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를 기대하면서 총신신대원총동창회 여성분과위원장 활동도 20여년 했고 지금도 총동창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변한 것은 없다. 요즘은 차라리 구차하게 요구하지 말자는 생각도 한다. 여동문 후배들에게 나는 힘들더라도 교단 안으로 들어와서 활동하라고 권하고 싶다. 신대원 동창회에도 적극적으로 나오라고 말하고 싶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교단 내에서 활동의 영역을 넓히는 일에 힘을 모아보자. 사실 이런 일을 하려해도 여동문들은 사무실 한칸이 없다. 여동문회 월례회나 기도회를 하려고 해도 정해진 곳이 없어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이것이 교단내 여동문들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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