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포럼 프로그래머>

호주에서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급부상한 탄층 가스(Coal Seam Gas)는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이름의 자원이지만, 새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다국적기업에게는 아주 좋은 먹거리다. 2000년대 초반 호주 퀸즐랜드 주에서부터 시작된 이 신사업은 ‘안나 브로노이스키’가 살고 있는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시드니 파크에서까지 손을 뻗쳤다. 이에 안나는 사람들에게 탄층 가스 채굴이 지역 주민의 삶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알리고자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바로 영화의 특성 중 하나인, 선동(propaganda)을 이용한 대국민 선전영화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것도 서양인들에는 독재자의 나라로 각인된 북한의 김정일이 만든 영화 교서 <영화 연출론(The cinema and directing)>에 입각하여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 안나는 우선 북한 입국 비자를 받아야만 한다. 그녀가 입국 비자를 받기까지 무려 2년이나 걸렸단다. 기다리다 지친 안나가 입국 비자 발급을 돕는 브로커에게 ‘김정일이 쓴 <영화 연출론>을 배워, 호주에서 인민의 적인 다국적 기업을 무찌르는 내용의 단편 영화 <정원사(gardner)>를 제작하려 한다’는 진심을 전달하자, 북한 당국은 이를 흔쾌히 수용하고 북한 영화 산업 전반을 소개하기 이른다.

김정일이 신뢰한 박정주 감독은 북한 국립영화제작소인 조선예술영화촬영소 곳곳을 안나에게 소개한다. 또한 그녀의 단편 시나리오 <정원사>를 보고 안나의 연출을 돕기 위해 직접 북한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그들을 연기 지도하고, 이를 안나에게 보여준다.

여기에서 안나는 왜 이 단편을 만들어야하는지와 각 캐릭터들을 설명하고 북한 배우들과 소통한다. 안나와 그들은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카메라는 간간히 평양의 현재 모습을 보여 준다. 우리에겐 낯선 전기로 움직이는 트롤리 버스, 길거리를 활기차게 지나가는 행인들, 북한 가요 <휘파람>을 틀어 놓고 웃으며 춤을 추는 어른과 아이들,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평양 보도를 질주하는 아이들의 노는 모습 등은 우리가 흔히 그려왔던 낡고 헐벗은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이다. 오히려 최근 남북 정상회담에 맞춰 보인 평양의 모습과 흡사하다.

안나는 호주로 돌아와서 그녀가 북한 영화인들에게 배운 대로 호주 배우들을 캐스팅하여 2주간의 합숙훈련을 통해 김정일의 영화연출론 7단계를 하나씩 단계적으로 가르치고 영화 제작에 돌입한다. 이때 배우들은 오렌지색 점프 슈트를 착용하고 연기를 배우는데, 우리에게는 쫄쫄이 타이즈를 입고 ‘무모한 도전’이라고 외치는 이들과 매우 흡사한 모습이라 코믹하지만 친숙하다.

이 영화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는 지난 9월 13일 국내 개봉했다. 필름포럼극장으로도 개봉 제의가 들어왔을 때, 처음에 나는 색안경을 끼고 이 영화를 대했다. 최근 몇 년간 개봉한 북한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의 특징 중에 하나는 서양인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이 선호하는 스타일로 편집하여 이야기를 전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이 영화도 으레 그 연장선에 있는 또 하나의 북한 관련 폭로 영화로만 생각했다.

다큐멘터리를 찍는 연출자는 대상 혹은 인물과 관계를 형성하여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그들을 관찰하거나 기록하고 얘기를 들어 준다. 몰래카메라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편집하여 관객과 소통한다. 스크린에 투영되는 인물이나 사회나 체제가 어떤 모습이든, 그것의 판단은 관객에게 맡기면 된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연출자의 취재대상에 대한 윤리의식이고 양심이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면, 히틀러와 레닌이, 김정일이 이용한 선전 선동 영화와 다름 아니다.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의 연출자 안나 브로노이스키는 정작 자신이 선동 영화를 배우기 위해 북한에 입국하여 북한의 창작자들로부터 김정일의 영화 기법을 전수받았지만, 그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동안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였고, 영화를 통해 그 마음을 그대로, 때론 유머러스하고 때론 가볍게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다.

지금 한반도에서 역사는 평화의 방향으로 서로 한 걸음씩 내딛고 있고, 온 나라가 이를 주목하고 있다. 북한의 진심을 온전히 지켜보고 냉정하게 판단하는 이성이 어느 때보다도 더욱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는 더더욱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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