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320년경 삼위일체를 부인하면서 예수는 하나님과 유사한 신성을 가진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였다. 여기에 대하여 삼단논법으로 아리우스의 주장에 반박한 사람이 아타나시우스였다. 그는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시다. 피조물은 같은 피조물을 구원할 수 없다. 고로 구원자 예수는 피조물이 아니며 하나님이시다.” 결국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된다.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니코메디아의 주교 유세비우스의 지지를 받으며 세를 확장하면서 테러를 일삼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집된 공의회가 니케아회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카르디아 호숫가 자신의 별궁이 있는 니케아에서 318명의 주교를 초청해 공의회를 열었다. 회의장 중앙에는 신약 성경이 놓였고 홀가장자리 보좌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좌정했다. 건장한 체격의 대제는 겸허한 모습으로 지난날 로마제국의 박해를 사과하고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교회의 분열은 전쟁이나 갈등보다 더 해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인간의 육체를 죽이나, 잘못된 교회는 영혼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아리우스에 대한 찬반 투표결과 주교 2명을 제외한 316명의 주교들이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데 가표를 던진다.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를 정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대주교 알렉산더(d.328)를 수행한 아타나시우스였다. 공의회는 성자 예수님에 대한 신조를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된 분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본질(Homoousios)을 가지신 참 하나님이시고 진리의 빛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 참 인간이라는 고백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확증하는 일이였다. 계속해서 공의회는 부활절을 유대교 달력으로 지키는 것을 폐하고 로마력에 따라 춘분이 지난 반월 직후의 일요일을 지키는 부활절을 확정 공포하였다. 가이샤라의 주교 유세비우스는 지난날의 박해시대를 회상하면서 “마치 그리스도의 왕국을 보는 것 같다.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이후 니케아공의회의 공로자 아타나시우스는 총 45년의 대주교 생활동안 18년 가까이 다섯 번이나 유배 생활과 망명 생활을 하여야 했다. 유배 생활 중 쓴 책이 <성자 안토니우스 생애>이다. 나지안주스의 주교 그레고리는 아타나시우스를 가리켜 “모든 덕목을 가진 모범”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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