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설교] 개혁 강단의 메시지

 

성찬에서 만나는 주님(요 6:47-51)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 이루심(요 19:30-34)

성령의 부으심을 사모합시다(행 2:33)

천상의 시각을 회복하라(계 5:1-6)

 

 

성찬에서 만나는 주님

김광열 교수(총신 신학대학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한복음 6:47-51) | 찬송가: 228장, 232장

본 교단 2016년 가을 총회에서 접수된 헌의안 중에는 전서노회에서 제출한 성찬식에 대한 개혁신학적 검토를 요청하는 안건이 있었습니다. 현재 전국 교회 안에서 시행되고 있는 성찬식에서는 개혁신학의 성찬론과는 다른 요소들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신학적으로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는 헌의안이었습니다.

우선 성찬식이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주님의 죽음만을 기억하는 과거 지향적 예식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찬 때 사용하는 하얀색 가운도 마치 장례식이나 입관식 때 시체를 덮는 모습을 연상시키며, 본 교단 헌법에서 사용 후 남은 떡 이나 포도주를 태우거나 묻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도 떡이나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이나 피라고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로마가톨릭의 화체설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가르친 성찬에서 만나는 주님은 죽은 주님이 아니라 부활 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는 그리스도이시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부활의 주님과의 만남과 교제와 연합을 성찬의 의미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또한 다른 편에서는 로마가톨릭의 문자적 해석과 함께 어떤 마술적인 예식 이해를 따르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성찬식을 단지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인간들의 무의미한 행사 정도 로만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이 가르친바 현재적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와 만남의 교제가 주어지는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예식임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예식으로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시행되는 성찬식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인간들이 시행하는 교회의 형식적인 행사들 중의 하나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종교개혁자 칼빈이 가르치는 개혁신학의 성찬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본 설교를 통해서 성찬이 베푸는 그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한국교회에서 시행되는 성찬 예식은 그 예식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만 초점을 맞춘 과거 지향적 방식으로 진행되거나 혹은 로마 가톨릭의 문자적 이해에 기초한 화체설에 대한 반작용으로 단지 예수님을 기념하는 예식 정도로만 가볍게 생각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종교개혁자 칼빈이 가르친 개혁신학의 성찬 이해를 바르게 가르쳐서 성찬이 참된 ‘은혜의 수단(방편)’으로서 교회에서 시행되어 성도의 신앙에 실제로 유익을 끼치는 예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개혁신학은 성찬에서의 떡과 포도주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이해하는 화체설도 거부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상징적으로만 이해하여 주님과의 실제적인 만남과 성령 의 은혜의 역사가 주어지는 예식임을 간과하는 기념설도 성경의 가르침을 떠난 것이라고 봅니다.

 

피해야 할 오해들

본문 48절을 보면 “내가 생명의 떡이니라”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이 과연 무슨 뜻입니까? 마가복음 14장 22절 이 하에서 주님은 유월절에 제자들을 다락방에 모아 놓고 최초의 성찬식을 거행하십니다. 그때 주님은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것 은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시고 포도주는 “언약의 피”라고 말씀 하셨는데,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선 우리는 성경의 표현들이 항상 문자적으로만 해석되는 것은 아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0장 7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문짝이라고 이해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것이겠지요.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로 들어가는 바른 통로는 예수님이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담을 넘어 들어가는 강도나 절도(요 10:8)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로마가톨릭교회와 같이 성찬의 떡을 문자적으로 예수님의 살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일단 본문 49절에서 그것은 ‘광야의 떡’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도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떡이긴 했지만,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배고픔을 일시적으로 해결해주기는 했지만, 영생에 이르게 하는 떡은 아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나가 어느 정도 생명을 유지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영생하게 하는 떡은 아니므로 ‘생명의 떡’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단지 그것은 앞으로 진정으로 하늘로 부터 오는 참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예표해주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의 앞부분으로 가보면, 생명의 떡은 또한 어떤 눈에 보이는 ‘신비한 음식’을 말하지도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32~33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는데, 그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떡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자 그 무리들이 그 떡을 좀 주셔서 그것을 먹고 영생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어떤 ‘신비한 떡’을 받아먹고 영생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마치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과 대화한 사마리아 여인의 생각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하신 후에 “네가 주는 물은 먹고 또 목마른 물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그 물을 좀 내게도 주셔서 물 길러 오지도 않고 다시 목마르지도 않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역시 사마리아 여인도 ‘입으로 마시는 어떤 신비한 물’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바로 로마가톨릭교회가 생각하는 소위 ‘화체설’의 개념인 것입니다. 성체성사(가톨릭의 성찬)를 행할 때 신부가 축복기도를 드리면 그때부터 떡은 예수님의 살로 바뀌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로 변화된다는 가톨릭의 화체설은 성찬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4장 22절 이하에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최초로 제자들에게 성찬식을 거행하실 때 “이것이 내 몸이니라”라고 하신 말씀은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문맥에서 주님이 떡을 주시면서 “내 몸이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의 몸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이 자신의 몸의 일부를 떼어 주시면서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주님의 몸은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떡을 주시며 “내 몸이니라”라 고 말씀하셨으므로 그 떡은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단지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고 하신 말씀들(요 14:2, 12)을 근거로 예수님은 승천 후에 성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이고, 그 주님의 인성이 이 땅 위에 계신 것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인격적인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분의 은혜를 받게 되지만, 예수님의 인성으로 이해되는 살과 피가 지상에 다시 오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또 다른 중요한 문제점은 가톨릭에서는 성찬 예식 때마다 실제로 주님의 몸이 찢기고 피가 흘려지는 골고다 언덕에서의 희생제사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데, 그것 역시 주님의 십자가의 사역은 한 번으로 완성되었다고 말씀하는 성경의 교훈(히 10:12)에서 벗어난 가르침인 것입니다.

 

츠빙글리의 기념설

스위스에서 전개되었던 종교개혁자들 중에는 제네바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존 칼빈 외에도 취리히에서 개혁을 주도했던 츠빙글리가 있습니다. 물론 이 두 개혁자는 가톨릭이 얘기하는 떡 과 포도주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에 근거한 어떤 마술적인 성례 예식을 거부하는 데에는 합의하였지만, 성경적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에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떡이나 포도주와 같은 물질에 묶여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 하시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성찬식에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그것이 몸속으로 들어가 어떤 신비한 역사를 일으켜서 주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가톨릭적인 이해)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속에서 은혜가 임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식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며, 떡과 포도주는 단지 주님을 상징하는 것일 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오늘의 본문 요한복음 6장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근거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은 주님과의 실재적인 연합과 교제의 역사가 주어지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가르쳤습니 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의안에 거하나니”(요 6:56). 츠빙글리가 가톨릭이 말하는 ‘육적 먹음’을 거부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성찬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영적 먹음’의 실재까지 부인하는 것은 요한복음 6장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반영하지 못하는 것 입니다. 성찬에 참여하여 믿음으로 그 잔과 떡을 먹을 때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과 연합되고 그분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징의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징적 의미라고 말할 때 그냥 공허한 상징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참된 상징은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를 나타내는 상 징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로를 주행하다가 철길 표지판이 나타나면 그 뒤에 철길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 표지판이 물론 철길은 아니지만 그 뒤에 철길이 분명히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가 문자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니며, 실체 되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즉 그것을 먹고 마시는 동안 성도들은 성령님의 역사하심 속에서 주님의 임재 안에 거하게 되고 주님을 만나 그분과 연합하고 교제하며 그분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찬식은 단지 주님을 기념하기만 하는 정도의 예식을 넘어 성령님의 역사가 주어지는 예식인 것입니다.

 

개혁신학이 가르치는 성경적 관점

종교개혁자 칼빈이 가르친 성경적 관점을 영적 실재설이라고 부릅니다. 성찬에서의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화된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그 떡과 포도주가 상징하고 있는 주님과의 실제적인 만남과 교제와 연합이 주어지는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영적 성장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서 신자들은 생명의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우리가 육신의 음식을 먹고 육신에 힘을 얻어 생명력 있게 활동하게 되듯이, 성찬에서 영의 양식을 먹음으로써 영적 은혜를 입고 영적 양육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신학자 로버트 레담 교수는 그와 같은 성찬의 의미를 보여주는 사건으로서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를 소개해 줍니다.

누가복음 24장 16절에서 두 제자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주님과 대화하게 됩니다. 그러자 주님은 십자가에 죽은 주님만 알았지, 부활의 주님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풀어 설명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그 두 제자에게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은 있었으나 어떤 분명한 변화가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30절에서 주님이 주시는 떡을 먹으면서 영의 양식을 공급받게 되고 영적 깨달음을 얻게 되어 부활의 주님을 참으로 만나는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그런데 30절에서 묘사되고 있는 내용이 바로 성찬식의 장면과 같습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물론 교회의 공식적인 성찬 예식의 자리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성 찬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서 직접 행하신 성찬 예식이었던 것입니다. 그 성찬의 떡을 받아먹은 두 제자는 놀라운 영적 양육과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더 이상 죽으 신 예수님만이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하신 구원의 주님으로 그들에게 찾아오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주신 떡 자체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떡을 받아먹을 때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주어진 깨달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주신 떡 이 상징해주는 영의 양식을 먹게 되었고, 그 영의 양식으로 인하여 더욱 생명력 있는 산 신앙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생명력 있는 산 신앙으로

오늘 한국교회에서 시행되는 성찬 예식을 통해서도 바로 이러한 성령님의 강력한 깨달음의 역사가 주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는 절망과 낙담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교회에서 시행되는 성찬식은 얼마나 그들에게 생명력 있는 영의 양식을 공급해주는 예식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혜의 방편들에는 기도, 말씀 그리고 성례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우리는 그동안 기도에 대해서는 많은 강조를 해왔습니다. 새벽기도, 금요기도, 금식기도, 합심기도 등. 그리고 그러한 기도생활은 한국교회가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효과적인 은혜의 방편이 되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해서도 성경공부를 강조하고, 성구 암송, 성경 읽기와 쓰기 그리고 제자훈련 등을 열심히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더욱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성례가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을 상대적으로 많이 놓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하여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가르친 성찬론에 대한 바른 이해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이 제정해주신 은혜의 방편 중의 하나인 성찬의 바른 시행을 통 해 교회의 회복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칼빈이 교회에서 성찬을 더 자주 행해야 한다고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에서 강조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개혁자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 신자에게 영적 깨달음이 주어지고 주님과의 영적 만남과 교제와 연합이 주어지는 이 귀한 은혜의 방편을 더욱 바르게 또 자주 사 용함으로써 회복과 성장의 은혜를 누리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 14장 25절에서 주님은 최초의 성찬 예식을 거행하신 후에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하셨습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말하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서 교회와 주님의 온전한 연합의 축제가 주어지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누릴 그날의 온전한 영광과 기쁨의 성찬을 소 망하면서 이 땅에서부터 성찬을 통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떡과 포도주를 먹으며 성령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주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저희들을 십자가에서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의 은혜로 살려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성찬에서 그 몸과 피를 통하여 주님의 은혜를 다시 덧입게 하시고, 부활의 주님 과 교제하며 연합하게 하시니 더욱 감사드립니다. 주님 다시 오셔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서 저희들이 다시 주님 뵈올 때에 누리게 될 그 온전한 영광과 기쁨의 교제를 소망하면서, 이 땅에서 허락하신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잘 달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 이루심

문병호 교수(총신 신학대학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 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 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요한 복음 19:30-34) | 찬송가: 201장 265장

세 가지 차원 : 인격, 우주, 교회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말씀 중 여섯 번째 말씀 곧 제6 성(聲)은 “다 이루었다”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으로 자신의 죽음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내 영 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마지막 일곱 번째 말씀을 남기시고(눅 23:46)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요 19:30).

“다 이루었다”는 원어를 보면 단 한 단어로 된 짧은 말씀으로서 모든 것이 소진되어 가슴을 쪼개며 올라오는 타는 목마름으로 혀가 말라붙어 움직이지도 않을 때 겨우 뱉어진 가장 작은 ‘큰소리’였습니다(마 27:50; 막 15:37). 주님의 이 음성이 심령 가운데 굉음처럼 울려야 성도의 삶에는 감사함과 담대함과 자족함이 있습니다(엡 3:12; 5:20; 빌 4:11).

“다 이루었다”는 완료수동형으로 나타납니다. 완료형이 사용 된 것은 임박한 죽음을 이미 된 일로 여기고 그 의미를 미리 확 정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수동형이 사용된 것은 아들의 죽음은 그 자체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의가 될 수 없고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시는 아버지의 인침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말씀은 “아버지의 뜻을 이 루소서!”라는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겟세마네에서부터 계속되는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하심과 원하심에 맡기는 아들의 겸비를 드러내는 ‘큰소리’였습니다.

주님의 다 이루심은 세 가지 차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성도 각자의 인격적 구원의 차원입니다. 구원의 작정은 개인적입니다. 부모가 믿는다고 자식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은 각자에게 부여되는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따른 주권적 은혜입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 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둘째, 우주적 구원의 차원입니다. 주님의 구속의 은총이 모든 피조물에게 미쳐 그분 안에서 하나로 ‘통일’됩니다. 천하에 있는 것은 모두 사람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 하니 도무지 그 가치와 효용이 하나님이 본래 부여하신 소용에 가닿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었습니다(롬 8:20). 십자가의 구속은 모든 만물을 이로부터 돌이켜 온전하게 합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셋째, 교회적 구원의 차원입니다. 주님의 구속의 은혜로 택함 받은 백성이 그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함께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자라갑니다.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 1:22-23).

교회는 언약의 자녀가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는 지상과 천상의 처소입니다. 성도들은 교회의 터에서 온전한 주님의 몸을 이루어갑니다. 이 지상에서는 세상 안에 교회가 있지만, 마지막에는 교회 안에 세상이 있게 됩니다. 교회는 모든 피조물이 거할 궁극적인 터가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가운데 존재합니다(계 21:2). 주님이 이를 다 이루셨습니다(요 19:30; 계 21:6). 이렇듯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죽음의 역사성과 함께 종말론적인 의미를 선포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처음과 끝’이 되십니다. 주님은 ‘끝이 없으신 끝’이시므로 우리도 그와 함께 영원히 삽니다.

 

언약과 절기와 제사를 다 이루심

주님은 ‘다’ 이루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하심은 약속이 있었음을 전제합니다. 주님은 구약의 언약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절기와 제사를 ‘다’ 완성하셨습니다.

성경에 280회 이상 나오는 모든 언약을 주님은 ‘다’ 이루셨습니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등과 맺은 구약의 모든 언약이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사람과 언약을 맺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언약의 실체는 그리스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맺은 모든 언약은 주님을 기다리는 예표적 언약이었습니다.

주님은 또한 모든 절기를 ‘다’ 이루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유월절 양”(고전 5:7),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36)이 되셨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야 합니다(출 12:7). 주님의 피를 믿는 것이 그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순절, 칠칠절, 맥추절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 15:20). 주님의 피가 씨앗이 되어 부활의 ‘첫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소산을 모두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토지에서 난 소산의 맏물이나 초태생을 드림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 돌아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출 13:2, 12; 34:19-20; 민 8:16; 신 26:1-11).

주님은 또한 초막절의 장막이 되십니다. “성전보다 큰 이”가 자기 자신을 깨뜨려 우리가 영원히 거할 처소가 되셨습니다(마 12:6). 그리하여 주님의 몸과 피를 양식과 음료로 삼아 우리가 광야와 같은 이 땅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는 나무의 가지를 꺾어 장막을 만들 필요도,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피할 바위시요 신령한 일용의 양식이 되십니다. 주님의 찢겨진 살로 지성소의 길이 열리고, 영원한 천국의 알곡으로 우리가 그곳에 저장됩니다. 지상의 장막이 걷히고 십자가의 지성소가 세워졌습니다. 지상의 양식이 그치고 십자가의 살과 피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공급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육체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입니다(히 10:20).

이렇듯 주님은 절기를 ‘다’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제사를 ‘다’ 이루셨습니다.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으로서 일생 동안 자신을 거룩하게 준비하셔서 단번에 영원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요 17:19; 벧전 1:19; 히 7:26-27; 10:10-14).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시자 왕으로서 거룩하시고, 악과 더러움이 없으시며,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는 주님이 고난의 순종을 통하여 자신을 온전히 준비하셔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히 5:8-9; 7:26). 그리하여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와 하나 되셨습니다(히 2:11).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구약의 모든 제사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주님께서 ‘절대적으로’ ‘다’ 이루셨습니다. 혀가 천장에 붙는 경각의 순간에 외치신 주님의 음성을 어찌 우리가 ‘상대적으로’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말세에는 미혹과 불법의 영 그리고 적그리스도들이 많이 나타납니다(요일 2:18). 주님이 덜 이루었다고 하면 미혹이요, 주님이 안 이루었다고 하면 불법입니다. 주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부족함 없이 ‘다’ 이루셨습니다. 주님이 자기 자신 전부를 헌신제인 번제로 드리셨습니다. 허공에 달리셔서 거제로, 몸을 요동치시며 요제로, 살이 짓이겨져서 소제로, 물과 피를 다 쏟아내셔서 전제로 드리셨습니다.

 

‘다’이루셔서 ‘다’주심

주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구원의 역사와 창조의 완성을 십자가의 피로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밝히 바라보아야 합니다(갈 3:1). 십자가가 아니라 그곳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들이 모든 것을 ‘다’ 이루신 것은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부요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십니다(계 3:14).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음을 받고, 보존되며, 운행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그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골 1:16). 주님은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 되시는 완전한 권세이시고, 모든 것을 통찰하시고 계시하시는 지식이시며,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능력이십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 5:6). 일곱이라는 수는 완전을 뜻합니다. 일곱 뿔은 완전한 권세를, 일곱 눈은 완전한 헤아림을, 일곱 영은 완전한 감화와 능력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일찍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안에 온전하게 존재합니다. 그가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십니다(고전 15:28).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초나 수치는 주님을 기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2).

십자가에서 모든 언약과 절기와 제사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의 그늘이 우리를 영원히 살리는 유일한 도피처가 됩니다. 완전하신 주님이 모든 의를 완전히 ‘다’ 이루셨습니다. 주님이 우리 존재의 ‘처음과 끝’이 되십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6-7).

아들의 ‘다’ 이루신 의는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공로입니다. 그가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죗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올려드리셨습니다(계 5:9).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그 안에 자기 자신을 주시기까지 하신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주님이 ‘다’ 이루신 의는 우리의 ‘생명’을 살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거룩하게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좇아 살게 됩니다.“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7).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계 19:13-14).

주님은 피 뿌린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가시며, 우리는 세마포 옷을 입고 주님을 따릅니다. ‘피 뿌린 옷’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계 19:8)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주님이 우리에 앞서 나아가십니다. 우리는 옳은 행실로 주님을 따라갑니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시 119:56).

주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생활, 우리의 인격과 행실까지도 그의 다 이루신 ‘의’로 온전케 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끝까지 이루십니다(빌 1:6).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십니다(롬 8:32). 주님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이루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많이 베푸십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영원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립니다!

(Soli Deo gloria in aeternum)

 

 

성령의 부으심을 사모합시다

박용규 교수(총신 신학대학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사도행전 2:33) | 찬송가: 190장, 183장

2017년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이면서 동시에 평양대부흥운동 11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절대적 표준이라는 사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재발견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분명히 교리 개혁이었 고, 신앙의 개혁이었습니다. 교리 개혁이 있었기 때문에 중세 의 타락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남긴 가장 중 요한 신앙적 재발견 가운데 하나가 성령의 이해입니다. 존 칼빈을 가리켜 ‘성령의 신학자’라고 말합니다. 존 칼빈은 성찬에서 영적 임재설을 가르쳤고,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을 해석하면서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교회가 진정으로 새롭게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셨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지만 저는 사도행전 2장 33절이 사도행전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은 구약의 요엘 선지자의 약속, 즉 요엘 2장 28-29절 그리고 이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베드로의 고백 중 사도행전 2장 16-17절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구절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에게 성령이 임하자 사람들은 이들을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기도 하고 신기하고 이상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오순절의 사건이 그냥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요엘이 언급한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며 그들에게 선포한 설교 내용이 사도행전 2장 33절입니다. 본문은 성령에 대해서 세 가지 사실을 선명하게 밝혀줍니다.

 

오순절 성령은 약속하신 성령

베드로는 오순절에 임한 성령이 “약속하신 성령”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은 “약속하신 성령”이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공생애 동안에도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요 14:16-17).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그 성령이 아버지가 보내시는 영이며, 동시에 예수님 자신이 보내시는 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26; 15:26).

성령은 아버지가 보내시기도 하시고, 아들이 보내시기도 하기 때문에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며 아들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에 반복적으로 약속하신 성령은 요엘 선지서에 있는 약속입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 17-18절에서 요엘 선지서를 인용하여 말합니다. 요엘서의 말씀과 사도행전의 기록을 비교할 때 요엘서에는 “만민”을 사도행전에는 “모든 육체”로, 요엘서의 “장래 일을 말할 것”을 사도행전에는 “예언”으로, 요엘서의 “이상”을 사도행전에는 “환상”으로 기록하였고 젊은이와 늙은이의 순서가 서로 바뀌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번역자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지 요엘서와 사도행전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성령의 부으심에 대한 약속은 너무도 명백하게 나타나고 일치합니다. 성령의 약속은 아버지의 약속이고 주님의 약속이며 요엘 구약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오늘 분문은 약속의 영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오순절의 성령에 대한 약속은 주님의 약속이고, 아버지의 약속이며, 이미 구약에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은 보내주신 영

“하나님이 예수를 오른손으로 높이시매”라는 말씀에서 오른손으로 높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우편으로 높이셨다는 말입니다. 오순절의 성령은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를 오른편으로 높이신 후에 주님이 아버지에게 받아서 보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높아지심을 말씀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우편으로 높아지실 것을 이미 제자들에게 언급하셨습니다(눅 22:69). 예수님도 자신이 영광을 받아야 성령의 강림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존 칼빈의 말대로 성령은 영원 전부터 계셨고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거룩한 조상들에게 주어졌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가 왕좌에 앉으시기 전까지는 훨씬 더 풍부한 이 은혜를 주시는 것을 연기하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순절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으신 후에 아버지께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부어주신 것입니다.

오순절의 성령은 놀라운 성령의 부어주심의 사건

주목할 사실은 단순한 임재가 아닌 “부어주셨느니라”(has poured out)고 증언한 내용입니다. 베드로의 “부어주셨느니라”는 증언은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두고 한 말입니다.

오순절의 성령을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확히 요엘 선지자를 통해 하신 약속 그대로입니다. 사도행전 2장 17-18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두 번이나 약속하셨습니다. 만민에게 그리고 다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만민은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 온 세계민족을 지칭합니다.

이 놀라운 성령의 부으심은 구약에 약속되어 있지만 구약에서는 한 번도 성취된 적이 없습니다. 이 성령의 부으심은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도 없었으며 심지어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이 세상에 주님이 계실 때도 없었던 사건입니다. 구약에도 성령이 역사하시고, 주님이 성육신하신 후에도 성령은 역사하셨지만 한 번도 성령의 부으심은 예수님이 높임을 받기 전에는 없었습니다. 성령의 부으심은 주님이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존 칼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령은 그 당시에 처음으로 주어지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성령은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거룩한 조상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왕좌에 앉히시기까지는 훨씬 더 풍부한 이 은혜를 주시는 일을 연기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조금 전에 본 바와 같이 ‘부어주리라’는 말로 잘 표시되어 있다.” 오순절 이후 성령의 역사는 칼빈의 말대로 구약과 비교할 수 없는 “훨씬 더 풍부한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성령은 구약에도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역사하셨지만 오순절 이후의 성령의 역사는 그 전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인 말세에 성령의 부으심이 이 땅에 성취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말세를 살고 있는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령의 부으심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부어지심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120문도에게만 일어난 사건인가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오순절 이후 계속된다는 것은 다음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요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만민’에게 그리고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들만 그 같은 성령의 부으심을 체험했습니다. 이는 요엘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만민에게 부어주시겠다는 약속, 그것도 말세에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사도행전 연구자인 브루스(F.F. Bruce)의 말대로 “분명히 120명의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그 자체만 놓고 볼 때는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리라는 예언을 다 성취시켰다고 볼 수 없으며 오직 성취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그와 같은 성령의 부으심이 임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둘째, 성령의 역사가 연속적이라는 사실은 오늘 본문의 “받아서”라는 말과 “부어주리라”는 말의 시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 받아서라는 말은 현재완료형(has received)으로 쓰였습니다. 쭉 일어난 사건을 말할 때 현재완료형을 사용합니다. 과거에 한 번 일어난 것이라면 시제를 과거로 사용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어주셨느니라’(has poured out)는 말도 현재완료입니다. 현재완료형으로 기록된 것은 성령의 부으심이 과거에 일어난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되는 연속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성령의 역사의 연속성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2.3)에도 나타납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The Ho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처럼 성령에 대해 명백하게 진술한 가르침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성령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구약에도 나오시고, 주님의 공생애 동안에도 나오시고, 오순절에 더욱 더 놀랍게 부으심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간절히 사모해야 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누가복음 11장 13절에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넷째, 성령의 부으심의 역사가 연속적이라는 사실은 오순절 날 일어난 동일한 성령의 부어주심의 역사가 사도행전에 연속적으로 나타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고넬료 가정에서 일어난 성령의 부으심의 역사를 이렇게 기록합니다(행 10:44-48). 누가는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고넬료 가정에 동일한 성령의 역사, 곧 “성령의 부으심”이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다시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 올라가 다른 제자들과 그곳에 모인 이들에게 그 성령의 부으심을 설명하면서 그들에게 임한 성령의 부으심이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은” 역사이며,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이며, 그 부으심의 사건을 목도하고는 주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증언합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그러면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으셔서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는데 누가 이방선교를 막겠느냐고 강하게 이방선교를 변호합니다. 할례자의 사도로 부름 받은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서 이방인들에게 동일한 성령의 부으심의 역사가 임하는 것을 보고 이방선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고넬료 가정에 성령을 부으신 사건(행 11:15-18)은 이방선교의 장이 열린 것을 의미합니다. 이 놀라운 성령의 부으심은 요엘 선지자의 약속의 성취이자 예수님의 약속의 성취이고, 주님이 약속하신 사도행전 1장 8절의 성취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날까지 이방인들을 국외자로서 자기 백성으로부터 구별하셨지만 이제 그들을 동일한 사랑 가운데 포옹해주시며 그들을 동일한 영예의 자리에 높여 주셨습니다.”

다섯째, 지난 기독교 2천 년의 역사 속에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정의했습니다. 미국 제1차 대각성운동, 미국 제2차 대각성운동, 평양대부흥운동, 웨일즈 부흥운동 등 성령의 부으심이 계속되었습니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는 부흥의 역사이고, 성령의 부으심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청교도라고 칭하는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놀라운 성령의 부으심을 자신의 저술에 반복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부으심을 갈망하라

한국교회는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에서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이 성령의 역사는 곧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07년 1월 15일 조지 매큔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이렇게 적었습니다. “강력한 성령께서 권능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장대현교회에 모인 집회는 최초의 실제적인 성령의 권능과 임재의 현시였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이전에 그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우리가 웨일즈와 인도 등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해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 또 노블은 사도행전 이후 이렇게 강력한 역사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907년 대부흥의 사건은 마삼락 교수의 표현을 빌린다면 지난 130년의 한국개신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습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을 기록한 여러 문헌들이 이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성령의 부으심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전반적으로 그 밖의 모든 것들보다 성령을 위해 기도할 것을 지시하고 격려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교회가 말세에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성령의 부으심과 그것에 의해서 성취될 것을 위해 대단히 열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에드워즈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위하여 매우 위대한 무엇을 성취하시려면 에스겔 36장 37절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듯이 그 일보다 자기 백성들의 기도를 선행시키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이한 기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는 먼저 은총과 간구의 영(슥 12:10)을 놀랍게 부어주시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눅 11:13). 이 말씀은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주역 하디가 은혜를 받은 말씀이고, 에드워즈가 우리가 성령을 사모하고 간구해야 할 근거로 제시한 성경구절이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풍성하게 부어주신다고 말합니다(롬 5:5). 여기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성령도 현재완료로 쓰였고, 사랑을 부어주셨다는 말도 현재완료입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주셔서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하게 부어짐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모난 성품을 다듬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힘들 때 우리의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살아 계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롬 8:26).

오순절 성령은 “약속의 성령”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그 이전에 없었던 ‘놀라운 부으심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을 구분해 주는 사건입니다. 성령의 부으심은 구약에도 없었고 주님의 공생애 동안에도 없었고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없었습니다. 승천하신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브루스의 표현대로 약속의 첫 성취입니다. 이 약속의 성취를 통해 신약교회가 태동된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듯 선교는 성령이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성령의 부으심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120문도에게 임했고, 고넬료의 가정에도 임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2천 년의 역사 속에서 성령의 부으심은 계속되었습니다. 칼빈의 말대로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교회는 진정한 개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에드워즈의 증언대로 이 놀라운 성령의 부으심, 참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지만 아무 곳에나 임하지 않고 사모하는 곳에 임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놀라운 부으심의 역사가 다시 이 땅에 일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다.

종교개혁 500주년, 평양대부흥운동 110주년을 맞은 올해 죽어가는 한국교회가 다시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일어나 이 땅의 교회들이 각성하고 이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다시 임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조국교회를 다시 살리고, 통일의 그날을 앞당기며 아시아와 세계선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날이 속히 오게 해달라고 간구하며 무릎으로 나아갑시다.

 

 

천상의 시각을 회복하라

이한수 교수(총신 신학대학원)

...(중략)...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요한계시록 5:1-6) | 찬송가: 235장, 359장

교단 정치를 많이 하는 어떤 중견 목사님이 사적인 식사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은 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 중요 한 자료이지만 교단 정치를 할 때 성경은 통하지 않는다. 정치할 때는 정치 논리가 따로 있다.” 그분에게 따로 존재하는 정치 논리란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개혁주의란 삶의 모든 영역 에서 성경이 신앙과 삶의 유일무이한 원리라는 것을 믿는 가르침인데, 교단 정치는 그분에게 성경의 교훈이 적용되지 않는 별 도의 영역인 것 같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지만, 바울 사도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고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에 매사에 땅을 지배하는 가치관이나 생각을 좇아 살아가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정이 다릅니다. 땅 위에 발을 딛고 살지만 천국시민으로서 하늘의 생각과 가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살다보면 돈의 힘을 알게 되고 권력의 달콤함에 매료되며 세상의 쾌락이 더 피부에 와 닿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잃어버리고 이런 것들을 좇아가는 것을 우리는 세속화라고 부릅니다. 세상과 교회의 경계선이 흐릿해져서 교회가 세상인지, 세상이 교회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 세속화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어떻게 세속화의 위기를 극복할 것인지를 교훈하는 책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는 승리의 공식

요한계시록은 교회들이 도미티안 황제 치하에서 큰 박해를 받던 시절(A.D. 95)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그전에도 자신들을 신격화했지만, 도미티안 황제가 등극하면서 황제숭배 정책을 제국 전역으로 확대하고 이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대대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시록은 특히 로마의 지배를 받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보내진 편지입 니다. 황제숭배는 제국의 다른 지역들보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더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도미티안은 이 지역에 자신의 수 많은 신상을 세워놓고 ‘주와 하나님’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이것은 극렬한 기독교 박해의 신호탄에 불과했습니다. 그를 이어 등 극한 다른 황제들도 황제숭배 정책을 지속하면서 오랫동안 기독 교회는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극심한 박해와 고난이 지속되면서 소아시아 교회들은 영적인 혼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편으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고 하나님은 역사의 주권자시며 그리스도께서 곧 오셔서 세상 역사를 끝내실 것이라고 믿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악의 세력들은 여전히 세상에서 번창하고 성도들은 끊임없이 모진 박해와 고난 중에 살아간다는 사실로 인해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해를 피할 최선의 길은 타협의 길을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황제숭배를 국가정책으로 용인하고 신전에 들어가 황제들을 향해 ‘주와 하나님’으로 부르면서 절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곳에서 세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로마 황제가 통치하는 영역일 뿐이었습니다. 옥에 갇히고 채찍질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그들은 인생의 패배자처럼 보였고 그들을 박해하는 세상 세력들은 승리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쓴 목적은 분명합니다. 환난과 박해에 직면한 소아시아 교회들이 영적 혼란을 극복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극복할까요? “세상의 진정한 주권자는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시다. 그가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세력들을 이기고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신다. 사탄의 세력들과 그에 의해 지배를 받는 세상 정치 세력들은 종국에 어린 양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것이고 그들의 모진 박해 아래서도 어린 양의 증인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그의 영원한 통치에 참여할 것이다.” 요한은 이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두 가지 초월’의 방식을 사용합니다. 하나는 ‘시간적 초월’입니다. 사진기의 줌을 사용하여 먼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쫙 끌어당겨 지금 여기서 보게 하는 방식입니다. 세상 나라를 상징하는 짐승도, 세상 나라에 부역하는 거짓선지자도, 이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붉은 용 사탄도 장차 어린 양에 의해 멸망당할 것을 미리 앞당겨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공간적 초월’입니다. 사진기의 줌을 사용하듯 하늘 성전 보좌에서 결정되어 집행될 사건들을 쫙 당겨서 지금 땅 아래서 보게 하는 방식입니다. 짐승도, 거짓선지자도, 붉은 용 사탄도 멸망당하여 불 못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다 어린 양이 만왕의 왕으로 앉아 계신 하늘성전 보좌에서 결정되고 집행되는 것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시간적 초월과 공간적 초월의 방식을 통해 이 사실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영적 안이함에 빠져 세상과 타협하려는 기독교인들을 흔들어 깨우고, 세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주로 증언하는 사명을 다하게 하려고 편지를 썼습니다.

 

어린 양의 죽음과 승리

계시록에서 요한은 ‘이기다’라는 술어를 총 13회 이상 씁니다. 지상의 교회들이 박해를 당하거나 세속화나 종교혼합주의의 위기를 겪고 있을 때마다 사도 요한은 “이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오늘 본문 5절에도 ‘이겼다’는 술어가 등장합니다. 요한은 흥미롭게도 ‘들은 것’(5절)과 ‘본 것’(6절)을 대조시킵니다. 그가 들은 것은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는 소리입니다. 사자는 짐승의 왕인데, 사자가 이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도 요한은 사자가 포효하는 장면을 보려고 얼굴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정작 본 것은 사자가 아니라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이었습니다(6절). 요한은 왜 이 두 상반되는 이미지를 결합시켜 놓았을까요? 그 두 대립되는 이미지들을 병행시킴으로써 요한은 희생적 죽음을 통해 정복한다는 새로운 상징을 만들어냈습니다. 어린 양 예수는 분명히 승리자이십니다. 그러나 그가 쟁취한 승리는 물리적 힘과 정치적 권력을 동원한 세속적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어린 양의 승리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그의 희생과 고난에 뿌리를 둔 승리였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쟁취한 승리를 묘사한 뒤에(5:5-9) 기독교인들도 그의 승리의 행진에 참여할 것을 기대합니다. 그는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기는 자”가 받을 종말론적인 보상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2:7, 11, 17, 26-28; 3:5, 12, 21). 이 구절들 중에서 3장 21절은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7장에 등장하는 144,000명은 메시아 전쟁에 참여한 군대로 묘사됩니다. 그들이 메시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물리적 힘과 정치권력을 동원한 세속적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찍 죽임을 당하였으나 다시 사신 어린 양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데서 오는 영적 승리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성도들에게 어린 양 예수께서 희생적 죽음을 통해 승리자가 되신 것처럼 그들도 동일한 발자취를 따라감으로 승리의 행진에 참여할 것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지상의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승리자는 막강한 군사력과 권력을 지닌 로마제국의 황제였을 것입니다. 땅에 거하는 사람들에게는(13:8) 순교자들을 죽인 짐승이 승리자인 것이 분명합니다. 짐승이 가진 막강한 정치적, 군사적 힘은 온 세상 사람들의 칭송과 경배의 대상이었고 예수의 증인들을 죽임으로써 승리자 행세를 했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의 권세와 지위를 얻게 되면 사람들은 칭송을 하고 그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권세의 자리에 오르면 성공한 사람이고 인생의 승리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요한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의 막강한 힘과 이교사회의 엄청난 압력 앞에서 무기력한 소수자들이었습니다. 타협을 거부하면 힘없이 끌려가 가련한 희생자가 되곤 했습니다. 짐승의 불가항력적인 세력을 거부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무모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현실을 천상의 관점에서 보도록 도전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대로 살다가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들이다. 성실하게 하나님을 증언하다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짐승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와 맞서 싸워 이기는 길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늘에서 본 환상이나 하늘에서 들린 음성(11:12; 14:2)은 모두 순교자들이 진짜 승리자라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천상의 관점을 가질 때만 스스로 이겼다고 선전하는 짐승의 환각을 깨부수어버릴 수 있습니다. 짐승의 것처럼 보인 승리는 사실 순교자들의 것이고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순교자들이 죽임을 당할 때 짐승은 승리의 개가를 불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어린 양의 승리로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어린 양의 죽음은 마귀의 세력들과 그들에 의해 조종되는 세상 세력들의 승리를 그들의 실패로 바꾸어 놓은 역전의 드라마입니다.

 

전투하는 교회

계시록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해 줄까요? 요한은 지상교회가 전투하는 교회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기독교인은 어린 양 예수를 따라 메시아 전쟁에 참여한 군사들입니다. 사탄의 세력들과 그 하수인이 되어 교회를 박해하는 부패한 세상 정치권력과 맞서 싸우는 군사들입니다. 하지만 전투에 동원된 그들의 무기는 칼과 폭력도, 세상의 정치권력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 세력들에게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역설적인 승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역설입니까? 그리스도는 희생적 죽음을 통해 사람들을 구속했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했습니다. 그가 고난과 죽음을 통해 사탄과 세상 세력들을 이기신 것처럼, 기독교인도 동일한 방식으로 그들을 이기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고후 10:4)입니다.

교회는 돈과 권력의 힘을 믿는 세상 단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을 통해 악을 정복한 어린 양의 구속공동체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승리가 세상의 정치권력이나 군사적인 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된 영적 능력은 돈과 권세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세상 사람들에게 환각을 심어주었습니다. 돈과 권력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또 그것을 가진 자만이 승리자이며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다는 환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희생적 죽음을 통해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기독교의 메시지는 어리석은 자들의 미신일 뿐이라는 환각을 심어주었습니다.

사실 기독교인조차도 지상의 관점에서만 보려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진정한 힘은 금권과 권력에서 나온다는 생각은 분명히 마귀가 심어준 환각일 뿐입니다. 이런 환각에 빠진 기독교인들이 교회 가운데 가득합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 천상의 관점은 그들 마음에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권력을 쥔 사람이 주권자요 승리자라는 세상의 관점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런 생각이 마귀가 심어준 환상이라고 가르칩니다.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할 참된 영적 능력은 그런 세속적인 힘의 논리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힘은 희생적 죽음과 고난을 통해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데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살 때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설적 능력이 됩니다. 예수께서 고난과 죽음을 통해 사람들을 죄 가운데서 해방하고 그들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킨 것처럼, 기독교인은 예수께서 본을 보이신 동일한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자입니다. 로마 제국은 그들의 막강한 군사력을 통해 세상을 정복한 승리자처럼 행세했지만 결국 멸망하지 않았습니까! 칼로 일어선 수많은 나라와 정치 세력들은 다 칼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어린 양 예수는 희생적 죽음을 통해 세상을 구속하셨고 열방에서 나온 허다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셨습니다. 천상의 관점에서 보면 오직 그들만이 ‘나라와 제사장’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영성은 땅의 시각을 버리고 천상의 시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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