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증인들과 개혁자들

김선규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101회 총회장)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12:1-3) | 찬송가: 84장, 585장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본받을 만한 훌륭한 믿음의 선진들을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경주를 잘 달린 수많은 증인들을 소개합니다. 500년 전 종교개혁자들도 이런 믿음의 증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자들의 본을 따라 배워야 할 역사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를 통해 믿음의 증인들을 열거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종교개혁자들의 믿음의 경주, 벗어 버림

첫째, ‘벗어 버림’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다음과 같이 명령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종교개혁자들은 벗어 버림의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작은 대학도시 비텐베르크의 교수 루터가 대학 교회 문에 95개의 항의문을 게시했습니다. 근처 지역에서 벌어진 면죄부 판매를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던 이 항의문은 순식간에 독일 전역에 출판되어 퍼짐으로써 개혁의 열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루터는 이후 로마가톨릭 신학자들과 여러 차례의 논쟁을 거치며 자신의 개혁 사상을 더 견고하게 주장했습니다. 교황은 결국 황제를 통해 루터의 입을 막으려 했습니다. 1521년 3월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회의에 호출당한 루터는 황제와 최고 권력자들 앞에 섰습니다. 황제는 종교개혁 사상을 주장한 모든 책들을 철회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담대하게 대답했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이런 답변은 모든 기득권과 장래의 포기를 의미했습니다. 사실상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바른 양심을 지키려 했던 루터의 담대한 선언을 통해 종교 개혁이 계속 전개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다시 한 번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 시대뿐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진리를 위한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담대함은 무언가를 이루어내기 위한 담대함이 아닙니다. 도리어 복음의 진리를 위해 자신의 유익과 필요를 내려놓을 수 있는 담대함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은 믿음의 경주를 달리는 것을 전제로 가장 먼저 ‘벗어 버림’을 말씀합니다.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합니다. 루터에게 ‘얽매이기 쉬운 죄’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사제로서 안정과 평안을 누리며 사는 보장된 삶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벗어 버린 ‘무거운 것’은 종교개혁 과정에서 당할 수 있는 고난과 핍박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변화와 개혁을 위해 지금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더 할까를 생각하기 이전에 무엇을 내려놓을까를 점검해야만 합니다. 내려놓을 때, 벗어 버릴 때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비로소 출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라톤에 참여하는 선수들은 많은 짐을 챙기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경기 주최 측에서 다 준비해 줄 것을 믿고 최대한 간단한 복장으로 경기에 임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으니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실 줄 믿고 되도록 단순하고 분명하게 믿음의 경주에 임해야 합니다. 우리가 챙겨 놓은 많은 것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불편하시지 않도록 우리를 온전히 벗어 놓아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믿음의 경주, 예수를 바라봄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종교개혁자들은 그들의 설교와 사역을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려 했습니다. 중세 로마가톨릭은 수많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과 교회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을 성인으로 모셨습니다. 성인들의 삶의 공로가 지금 신자들의 구원에 유용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마리아 숭배가 조장되었고 예배가 변질되었습니다. 미사 때 받는 떡이 예수님의 몸이며 그 몸을 먹으면 남아 있는 우리의 남은 죄책이 해결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반면 미사나 고해성사 등 사제들이 제공하는 성사를 제대로 받지 않으면 천국이 아닌 연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리고 연옥에 떨어진 사람들을 천국으로 가게 하려면 교황청에서 발행한 면죄부를 사야 한다고 선동했습니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런 우상 숭배에 맞서 바른 예배를 회복하려 했습니다. 교회가 예배를 핑계로 예수 그리스도마저 도구로 삼아 신자들의 양심을 속박하는 것은 옳지 않았습 니다. 예배는 구원을 받기 위한 공로의 행위가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에 대한 성도들의 감사와 헌신이어야 했습니다. 예배에서는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선포되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감사가 드려져야 했습니다.

“성례의 본체 또는 실체는 그리스도라고 나는 주장한다. 성례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견고성을 지니며 그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는다.”(기독교강요, 4권 14장 16절)

바른 예배의 회복을 위해 칼빈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 중심의 예배를 시행했습니다. 평생 매주 정해진 본문을 순서에 따라 강해하는 연속강해 설교를 실천했습니다. 그의 연속강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하나님의 구속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주중에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꾸준히 강의했습니다. 이러한 칼빈의 지속적인 설교와 강의를 통해 제네바가 변화되었습니다. 1559년 제네바에 세워진 아카데미에서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 훈련받은 설교자들을 통해 유럽 각국에 개혁교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을 통해 종교개혁이 더 확고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성도들과 교회에 사명으로 주신 믿음의 경주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교회의 증거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확증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여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 복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기차역 안내소에서 사람들은 기차 시간과 승강장을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만일 안내소 직원이 기차 시간과 승강장은 제대로 말해주지 않고 역에 새로 생긴 편의시설이나 새로 나온 협찬 상품만을 홍보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잠시 관심을 가지고 모여들 수 있겠지만 결국 필요한 정보를 얻지 못해 실망하고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의 다른 것을 자랑하고 이야기하면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는 있겠지만 결국 빛과 소금으로서의 본분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이 어지러운 시대 속에서 우리 교회가 바라보며 자랑하는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지 점검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시며 믿음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믿음의 경주, 인내

셋째, ‘인내’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써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달릴 수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 땅 위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그리스도는 보좌 위에 앉으신 영광의 주님 이전에 고난을 참으신 인내의 주님이십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종교개혁자들은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당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 장로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 지대한 역할을 했던 존 녹스는 많은 고난을 인내했던 종교개혁 자였습니다. 그는 로마가톨릭 교인인 왕비와 그 교권에 도전한 사람들을 위해 설교했다는 이유로 19개월간 프랑스 함선의 노예로 노를 저으며 복역했습니다. 석방되어 잠시 잉글랜드 교회의 목회자로 일할 수 있었지만 로마가톨릭 교인인 메리 여왕이 새로 즉위하자 모든 사역과 재산을 포기하고 피난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피난 중에 담당한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피난민 교회 사역도 그를 시기하고 비난하는 국교회주의자들에 의해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녹스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말씀의 나팔수로 부르신 소명을 붙잡았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국 스코틀랜드에 돌아가 진리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다시 세우게 하시리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1558년 고국으로 돌아온 녹스는 종교개혁 세력이 승리하고 스코틀랜드가 새로운 개신교 국가가 되는 과정에 지도자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1560년 그는 피난 기간 동안 제네바에서 보고 경험한 장로교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장로교회는 민주적인 대의제도와 국가로부터 교회의 독립적인 치리를 실시했습니다.

장로교 제도는 어떤 사람도 어떤 계급도 교회를 주장하지 않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신학적 목적을 지향했습니다. 이를 위해 모든 지체들은 권한과 역할을 상대화하고 제한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녹스는 스코틀랜드 교회 최고의 인물이었지만 그는 어떤 높은 직책도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지인 에든버러 세인트자일스 교회의 설교자였을 뿐이었습니다. 녹스는 자신의 강단에서 담대하게 회개하지 않는 로마가톨릭 왕실과 헌신하지 않는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회개를 촉구하며 진리의 나팔을 불었습니다. 여왕의 위협과 귀족들의 회유가 있었지만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드러나시도록 자신의 무덤조차 제대로 남기지 않았습니다.

개혁의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수많은 위협과 비난과 회유와 유혹이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와 동성애와 과학적 사고가 대세인 시대 조류 속에서 성경 말씀대로 가르치고 믿는 것은 결 코 쉽지 않은 믿음의 경주입니다.

우리를 드러내고 높여야 도태되지 않는다고 유혹하는 현대의 상업주의와 성공주의 속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온전히 내어 드린다는 것은 어쩌면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았던 종교개혁자들의 유산 위에 우리는 장로교회로 세워져 있습니다.

장로교 제도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교회의 머리로서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내려는 신학적 목표를 계승합니다(엡 1:22-23). 모든 은사와 직분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여기고 감사로 그 목적에 맞게 올려드립니다. 스스로 권한과 역할의 한계를 지우고 모든 지체들을 존중하며 다만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합니다. 우리의 상급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 하늘에 있음을 소망하며 이곳에서 우리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인내의 경주를 잘 달려야 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한국 장로교회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의 선진들이 남겨준 신앙의 유산들을 되돌아보기 원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며 지금도 살아 계셔서 통치하시는 그분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해 삶과 죽음을 드렸던 공동체의 실천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도 그 믿음의 선진들처럼 후손들과 세계 여러 교회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어 하나님께 칭찬 들을 수 있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 속에 성경이 있습니까?

전계헌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102회 총회장)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5- 10) | 찬송가: 285장, 620장

1517년 10월 31일에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 운동을 세계적으로 확산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본인이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려는 어떤 꿈을 가지고 시도한 것 역시 아닙니다. 루터의 마음에는 부패하고 타락하여 하나의 종교로 전락해 버린 로마가톨릭이 잃어버린 성경을 회복해야 한다는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에서부터 개혁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의 기독교나 중세 가톨릭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산하 교회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기기에 우리는 잠 못 이루는 고뇌가 있습니다.

 

성경적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말씀을 읽고 듣고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매일 일상의 삶속에 성경 말씀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얼마나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을 배운 대로 가르치고 날마다 입으로 반복하지만 과연 성경이 내 신앙 속에 살아 역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서 약동하고 있는가의 문제는 중요하고 심각한 일입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복의 개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복의 개념이 너무나도 세속적이고 통속적인 관념으로 가득합니다. 교회 안의 지체들의 마음에 이미 샤먼과 맘몬의 우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강단에서 외치는 복의 개념은 기복주의의 토대 위에 축복을 말하고 성경구절을 절묘하게 짜깁기하여 합리화하려고 애를 씁니다. 성경의 복을 복으로 선포하지 않고 기복적인 신앙의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변명하고 변증하여 주입하려고 하는 모양새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보훈의 8복을 읽으면서 이 복이 우리에게 주어진 복이라고 같이 아멘 할 수 있겠습니까?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며,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로서의 우리는 복 받은 사람이라고 자신 있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읽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지만 성경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성경 지식은 많으나 결국 그릇되게 행했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으로밖에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삭개오 이야기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지는 말씀도 흔치 않습니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 때부터 시작하여 주일설교나 부흥회 때 수없이 들어온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부단히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십니다. 삭개오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이야기를 말입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은 ‘의로운 사람’, ‘순결한 사람’, ‘청결한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보면 삭개오처럼 의롭지도 못하고 청결하지도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삭개오의 직업은 여리고의 세리장이었습니다. 세리장은 세관의 최고책임자입니다. 여리고는 발삼나무의 주산지로서 특산물에 대한 부과세를 징수했습니다. 또 길르앗 지방으로부터 들어오는 향유를 팔레스타인 각처로 보내는 요지인 여리고를 지나게 되어 세금을 과잉 징수하여 국수주의자 바리새인들에게서 매국노 취급을 받았습니다.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세리들처럼 ‘세리는 허가 낸 도둑’이라는 인식에 맞게 삭개오도 부당하게 과잉 부과된 세금을 징수하여 많은 이익을 취하고 큰 부를 누렸습니다. 돈과 명예를 소유한 부자요 관료였던 삭개오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어떻든 삭개오는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의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라는 직업 때문에 그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창기와 함께 더러운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당시 사회적인 통념으로는 죄인의 대명사가 ‘세리와 창기’였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삭개오는 사람들이 상대하기를 꺼려하는 존재였습니다.

누가복음 19장 3~4절에서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라고 말씀합니다. 때마침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보려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키가 작고, 사람들이 많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방해요인을 무릅쓰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돌무화과나무 열매는 무화과와 유사한데 잎은 뽕나무와 같습니다. 삭개오는 나무에 올라감으로써 자기의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이것은 삭개오가 가진 호기심의 결과였습니다. 발명, 창작, 심지어 영적 변화까지도 모든 위대한 새로운 일은 호기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삭개오의 호기심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영적 호기심이었습니다. 영적 호기심을 가진 것은 삭개오가 영적으로 방황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삭개오가 소유한 돈과 명예라는 것은 필요하고 좋고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생활에 필요한 것의 일부만 충족시켜줄 뿐입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만족을 할 수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에서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삭개오의 이름을 아셨을까요? 신적 능력일까요? 삭개오가 소문난 사람이기에 아셨을까요? 그런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삭개오를 지목하여 인격적으로 부르신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단순한 호기심으로 나무에 올라간 것이 아님을 아셨고 그의 갈급해 하는 마음을 꿰뚫어 보셨다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있는 곳에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새 생명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이 말씀이 소중한 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만남은 예수님의 주권적인 초대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가시는 일은 갑자기 한 번 가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말씀은 필요성을 강조한 예수님의 강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극히 자연스럽게 보일지라도 주님은 계획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 그리고 주일에 교회당에 앉아 예배하는 이 일이 하나님께서 치밀하게 계획하신 일이라는 사실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6절에 보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집에 영접했습니다. 그에게 이것은 너무나 뜻밖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나무 위에서 보 기만해도 만족할 텐데 자기 집에 모시다니요. 삭개오에게 이것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감격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광경을 바라보는 뭇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 당시의 관념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뭇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죄악된 인간의 심사요, 고정관념의 틀을 깨지 못한 처신이고,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 채 남의 눈의 티끌만 보려는 죄악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의 전통적인 관습을 깨고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본문 8절에서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고백 하고 있습니다. 삭개오의 집에 쓰나미 같은 변화, 핵폭풍 같은 영적인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창기와 함께 죄인으로 정죄되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자 삭개오의 삶이 180도 변화되었습니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고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동족의 세금을 과잉 징수하여 로마 제국에 갔다 바치는 매국노 같은 인간 삭개오. 세금으로 동족의 등골을 빼서 치부하는 유대인의 저주거리이며 인간쓰레기 삭개오. 미움과 질시와 죄인의 대명사로 불리는 삭개오. 그런 그가 180도 새로운 인간으로 변한 것입니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언을 보십시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9-10절). 구원의 선언, 생명의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배회하는 인생, 기웃거리는 인생, 길을 잃어 방황하는 현대판 삭개오 같은 인간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해결의 길은 부귀나 권력이나 명예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영적으로 방황하고 배회하고 있을 때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교훈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분명한 목적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서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나무 옆길로 지나가신 것도 이렇게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행하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집중해야 할 교훈은 방황하는 한 생명을 위한 ‘우리의 관심과 행동’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해 보이지만 방황하는 인생들이 많습니다. 어디가 길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어떻게 해야 생명을 얻는지 모르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가장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등 너머로 바라보니 온갖 욕설을 나오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화가 났지만 부드럽게 물었습니다. “애야, 어디서 이런 말들을 배웠니?” “이 말들은 어제 아빠가 화났을 때 엄마에게 한 말이잖아요.” 아빠로서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려고 노력은 하면서도 그 마음과는 다르게 행동한 한 아버지의 예입니다. 자녀를 교육하는 아빠의 모습과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이 전혀 달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 이론과 실제가 전혀 다른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알고,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말씀 이 우리 실제 생활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는 모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 속에 녹아지고 생활 속 에서 실천되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인하여 세상이 변화되고 맛을 내고 밝아지는 것.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말씀의 교훈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도그마화했습니다. 이론화했습니다. 지식화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성경을 지적인 것으로만 받았습니다. 조금 아는 것으로만 만족했습니 다. 성경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신앙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아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중에 말씀에 대한 실천은 없고 논쟁만 있습니다. 신학, 교리, 지식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감동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사변적인 이론만 있고 시끄러운 논쟁만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입니다. 생활입니다. 지금 도덕적, 영적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생활입니다. 신앙의 생활화, 복음의 생활화, 말씀의 생활화가 우리가 당면한 지금 해야 할 급선무입니다.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사업가인 선교사가 북한 호텔에서 일하는 한 소년을 만났습니다. 소년은 외국 사람을 발견하자 즉시 달려가 손을 붙잡더니 손가락으로 그의 손에 십자가 문양을 그렸습니다. 마치 로마제국 통치하에 숨어 살던 초대 기독교인들이 물고기를 표시하여 그리스도인인 것을 알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업가인 선교사는 북한에 가면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선교사는 소년을 다음날 은밀히 만났습니다. 그 소년의 아버지는 믿음을 지키다가 몇 해 전에 투옥되었고, 가족들은 북한 정부의 야만적인 대우를 받아 고통을 겪어왔으며, 생존을 위해 끼니를 구걸해야 했다고 했습니다. 그해에는 가뭄이 심해 북한 전역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심각한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선교사는 어려운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해주면 좋겠는가 물었는데 소년은 뜻밖에 다른 부탁을 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호텔에서 일하면서 번 돈의 십일조를 가져가주세요. 세례를 베풀어 주세요. 성찬을 베풀어주세요. 그리고 좀 더 좋은 성경책을 주세요.” 소년의 믿음에 감동한 선교사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소년이 알고 있는 것은 물질적인 도움을 받으면 하루 이틀은 지내겠지만 다시 이전 가난으로 돌아갈 것이고, 영적인 도움을 받으면 영원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지혜롭고 영특하고 신령한 소년이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청지기로서 주님의 일꾼이며 주님의 웨이터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청지기로서 다음과 같은 신조를 작정하여 한번 당차게 살아봅시다.

첫째, 성공하려고 하지 말고 거룩하라.

둘째, 유명하려고 하지 말고 헌신하라.

셋째,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낮아지라.

넷째, 교만하려고 하지 말고 겸손하라.

다섯째, 대접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라.

여섯째, 전도하는 것을 구경만 하지 말고 증인이 되라.

일곱째, 사랑 없다고만 하지 말고 먼저 사랑하라.

여덟째, 기도의 능력을 믿기만 하지 말고 새벽을 깨우며 기도 하라.

아홉째, 감사가 좋다고만 하지 말고 항상 감사하라.

열째, 성경을 들고만 다니지 말고 읽어라.

열한 번째, 비평만 하지 말고 행동하라.

마지막으로 청지기 행세만 하지 말고 섬기는 종으로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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