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중심 사상

종교개혁의 시작

존 칼빈의 종교개혁

칼빈주의 신학

예배의 개혁

언약 신학

칼빈주의 5대 교리

칼빈주의의 전개와 영향력

종교개혁 5대 강령

 

종교개혁의 시작

종교개혁(宗敎改革, Protestant Reformation)은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는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부패한 교회를 새롭게 변혁시키고자 했던 신학운동이다.

로마가톨릭 사제였던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였다. 그리고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루터의 반박문을 증명하는 유일한 문서인 요하네스 슈나이더(Johannes Schneider)의 육필원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1517년 루터는 엘베 강변 비텐베르크에서 대학의 오랜 관습에 따라 모종의 명제를 논쟁용으로 제출했다. 그러나 너무나 조심스러운 형태라서 누군가를 비방·중상할 의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따르면 종교개혁은 가톨릭에 대하여 급진적으로 도전한 것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형태로 촉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개혁의 불길은 타올랐고 유례없는 변혁이 시작되었다. 신앙의 본질을 되찾으려는 열정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종교개혁 운동의 결과 종교개혁 이전의 칼케돈파인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비 칼케돈파인 오리엔트 정교회와 신교 혹은 개신교로 불리는 장로교, 개혁교회, 루터교, 침례교, 성공회 등의 교파로 분리되었다. 종교개혁은 존 칼빈에 의해 신학적으로 완성되어, 제네바를 중심해서 전 유럽으로 그리고 세계로 뻗어나갔다.

 

존 칼빈의 종교개혁(John Calvin, 1509-1564)

독일에서 루터를 중심으로 개혁운동이 일어남과 더불어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제네바에서는 칼빈의 신앙운동이 꽃을 피웠다. 이후 칼빈의 제자였던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개혁교회 (Reformed Church)신학을 전함으로써 스코틀랜드에 장로회 전통을 확고하게 하였다.

 

1537년 1월에 칼빈은 제네바의 대 의회 앞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담긴 비망록을 전달하였다. 성만찬, 공중 예배에서의 찬양, 어린이의 종교교육, 결혼 등 네 가지였다. 성만찬은 가급적 자주 집행하는 것이 좋으나 현재의 형편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행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합당한 자는 주님의 몸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출교에 관한 치리를 제정해서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회중에게는 시편찬송을 적극적으로 권장함과 동시에 가르치도록 하였고, 어린이들에게는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간략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작성해서 목회자가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결혼은 지금까지 악하고 비성경적인 교황청 법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새로운 제안은 교회의 행정에 관한 조항으로서 소 의회와 대 의회를 통과하였다. 성만찬은 일 년에 네 차례 집행하며, 결혼 광고는 예식 거행에 앞서서 3주 동안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제네바 시는 칼빈과 그의 동료 파렐의 가르침에 따라서 종교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다같이 개혁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1538년 1월에 시의회는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성 만찬을 베풀지 않는다고 결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른시의 간섭과 더불어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세례파와 손을 잡았고 파렐과 칼빈을 아리우스주의자이며 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베른 의회는 제네바를 위시한 전 지역을 그들의 손에 넣으려고 하였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연약한 제네바 시의회는 3월에 이르러서 베른의 예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파렐, 칼빈은 제네바를 떠날 것을 명받았다.

 

파렐과 칼빈은 제네바를 떠났다. 칼빈은 허탈감에 빠져서 스트라스부르에서 연구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간 파렐과 더불어서 3년 동안 개혁을 시도하였던 모든 일이 허사로 끝난 데 대한 분노와 갈등을 이겨내면서 연구와 함께 프랑스 난민들을 돌보는 등 목회 일에 전념하였다.

 

파렐과 칼빈이 떠난 제네바의 상황은 예전보다 좋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되었다. 특별평의원들은 새로 부임한 목회자를 자기의 종같이 부렸으며, 모든 가장들에게 교회에 참석토록 하는 의무규정을 부과하였다. 주의 만찬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도시의 도덕적 수준은 날로 저하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평의원들은 인기가 떨어져 다음해 선거에서 재당선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칼빈을 다시 초청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 되었고 1539년 10월 대 의회에서 대표자를 보내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칼빈은 보름스 의회에 참석 중이었기 때문에 답장을 유보한 채 번민에 싸여 있었다. 이때 파렐의 충고가 칼빈에게 크게 작용하였다. 파렐은 제네바가 차지하는 지역적인 중요성을 들어서 제네바가 개혁되면 인근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의 복음화가 가속화된다고 강력하게 설득하였다. 결국 칼빈은 3년여 동안 제네바를 떠나 있다가 1541년 9월 13일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다. 돌아온 그는 제네바 교회규범을 제정하여 의회에서 통과시켰고, 개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엄격한 훈련과 경건생활 실천을 위한 각종 제도의 수립과 이단을 색출해서 처리하는데 이르기까지 칼빈은 정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소위 말하는 외국인이었다. 이런 그가 제네바에서 세력을 얻어 확장시키기까지의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다시 돌아온 칼빈과 시의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마찰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칼빈의 사상을 율법적인 독선이라고 비난하였다. 마치 루터에게 농민 전쟁이 예기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였듯이 칼빈도 이들로 인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개혁은 철저하였다. 이단성이 있는 것은 정죄하였으며, 자유주의자들에 대하여서는 전통신앙과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신앙 본래의 모습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중 성경적인 부분은 유지하였으나 성경에 위배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단호하게 개혁하였다. 미사를 폐지하여 성경적 예배로 바꾸었으며, 교계제도를 장로제도로 바꾸었다. 또한 인본주의적 공로사상과 우상 숭배적 관행을 개혁하였다.

 

칼빈주의 신학

16세기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전통을 비판하며 이를 바꾸고자 한 종교개혁은 결국 개신교회의 분리를 가져왔다. 종교개혁의 주요 인물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존 칼빈의 영향은 매우 컸다. 이는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의 영향력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칼빈은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시각에서 그때까지 드러난 기독교 진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술하려고 하였다.

그의 신학은 기독교강요에 잘 나타나고 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만큼 기독교 신학과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예는 드물다. 유럽 전역으로 개혁이 퍼지면서 개신교회의 신학은 점차 칼빈 쪽으로 수렴되었다. 지금도 개혁의 전통을 고수하는 신학을 가리키는 개혁주의라는 말을 ‘칼빈주의’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칼빈주의의 핵심 주장은 ‘칼빈주의 5대 강령’이라는 다섯 가지로 요약되는데, 이것은 훗날 개혁주의에 반대하는 알미니안주의 자들의 이론에 반박하기 위해 도르트 총회에서 정해진 것이다.

칼빈주의(Calvinism) 즉 개혁주의(Reformed Theology)는 존 칼빈이 주창한 기독교의 사상 및 신학 사조로서 종교개혁을 통해 체계화되었고 개신교의 주요 신학으로 자리 잡은 사상이다. 이와 같이 그 사상의 체계적인 정리와 발전에 칼빈이 미친 커다란 영향으로 인해서 ‘칼빈주의’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칼빈주의가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 주류의 신학으로 자리 잡아가면서 유럽 각지에 개혁교회(Reformed Church)가 발생하였다. 이들 개혁교회를 통해 칼빈주의는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개혁교회 전통을 계승하는 교파의 하나로서 칼빈주의를 말할 때에는 개혁주의라는 표현을 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별칭들이 있는데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은혜의 교리라고도 불린다.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개신교 교파들로는 종교개혁 때부터 시작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가 대표적이다. 이와 같은 칼빈주의는 문화, 경제, 교육, 정치 그리고 복지를 포함한 근대 사회를 형성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개혁주의를 잘 나타내는 문서로는 개혁교회의 역사적 문서들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독일), 네덜란드 신앙고백, 도르트 신조 (네덜란드)가 있으며, 이외에도 제2스위스 신앙고백(츠빙글리 전통), 프랑스 신앙고백, 제네바 요리문답(제네바 전통),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스코틀랜드) 등이 있다.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그 대소요리 문답 또한 개혁주의를 잘 반영 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초로 작성한 개혁 침례교회의 제2차 런던 신앙고백은 침례 신앙 위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예배의 개혁

칼빈주의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에서 예배(성경, 기도, 찬송, 헌금)를 성찬과 세례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특수한 은혜를 내리시기 위해 정하신 방도라고 본다. 이것들을 은혜의 방도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방도가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칼빈주의의 특징이다. 이는 물론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정신과 부합된다. 특히 예배에 해당하는 도리들을 묶어 예배의 규정적 원리라고 부르는데, 예를 들어 예배할 때 예수님이라고 상상하여 만든 그림이나 조각상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표적인 규정적 원리의 하나이다. 그 원리들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칼빈주의 신학자들 사이에도 이견이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교파별로 이러한 규정적 원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예배의 규정적 원리에 대한 근거로 사용되는 성경구절은 십계명 중 둘째 계명인 “우상을 만들어 그것들에게 절(예배)하지 말라”이다. 이 둘째 계명은 야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은 이미 첫째 계명에서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째 계명의 뜻은 야훼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할 때 그분의 형상이라고 하면서 무엇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 역사를 출애굽기 32장 4절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둘째 계명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어떤 기준을 내리고 계시다는 것이다.

 

언약신학

칼빈주의 신학은 언약을 중심으로 심화되어왔다. 언약신학 (Covenant Theology)은 칼빈주의의 은혜 강조를 잘 드러내는 중심 개념이 되었다. 언약은 성경에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에게 하신 약속이다. 그 내용은 지켜야 할 의무 조항들로 이루어지며 의무를 불이행할 경우 언약은 파기된다. 칼빈주의 자들은 언약이 인간의 요구조건 없이 하나님의 선언과 함께 바로 체결된다고 말하며, 성경의 여러 가지 언약이 결국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본다.

첫 번째는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이다. 삼위일체 중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맺은 언약이다. 그리스도 쪽에서는 모든 사람의 죗 값에 해당하는 심판을 맛보고 구원에 필요한 조건을 자기 백성들을 대신해서 이행하겠다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 쪽에서는 그리스도를 그의 백성들의 머리로 인정하고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의로움을 백성들의 고난과 죽음, 의로움으로 인정하여 그들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내용이다. 이 언약은 창세전에 체결되었으며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수되었다고 본다.

두 번째는 행위언약(covenant of works)이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은 언약이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아담은 실패했으며 이로써 인류에게 죽음이 왔다고 본다.

세 번째는 은혜언약(covenant of grace)이다. 아담이 실패한 이후 곧바로 모든 인류와 하나님이 맺은 언약이다. 사람 쪽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받으실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나님 쪽에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삼아주신다는 내용이다.

 

칼빈주의 5대 교리

칼빈주의와 관련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칼빈주의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막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전적 타락설에서 칼빈주의는 자연인이 믿을 수 있는 기능이나 선택의 자유를 잃었다는 것이 아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심성 때문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심성을 바꾸어주실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에라스무스는 이러한 칼빈주의 원죄론에 반대하고 ‘사람은 하나님이 심성을 따로 바꾸어 주시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반박하고 전적 타락설을 주장한 것이 루터의 노예의지론 (Bondage of the Will)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의 역할에 관련된 것으로서 이에 대한 기독교 내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 합력설(synergism)로서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지만 사람이 그것을 취하느냐의 여부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단독설(monergism)로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취하는 것도 그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하나님께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에라스무스의 주장은 합력설에 해당하며 마틴 루터의 주장은 단독설에 해당된다.

합력설과 단독설의 논쟁은 기독교 초창기에 이미 있었고 이것이 잘 알려진 것은 4~5세기에 있었던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이다. 펠라기우스는 합력설을 주장하고 어거스틴은 단독설 을 주장하였는데 카르타고 회의에서 교회는 펠라기우스 사상을 정죄하였다. 종교개혁 이후로는 17세기에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합력설을 주장하였다. 이때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도르트 총회에서 작성된 것이 ‘칼빈주의 5대강령’이다. 칼빈주의 5대 교리는 다음과 같다.

1) 전적타락 :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은 그 질(質)이 달라서 그중에는 구원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믿음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지만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전적무능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의할 것은 여기서 ‘무능력’이라고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참된 믿음을 갖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수 없으니”라는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보건대 하나님이 참된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그리스도를 진실 되게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2) 무조건선택 : 전적타락 설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것인데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3) 제한속죄 :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사람이 결국 ‘구속언약’ 또는 ‘은혜언약’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4) 불가항력적 은혜 : 요한복음 6장 37절에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언약’과도 연관이 있다.

5) 성도의견인 : 요한복음 6장 39절에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구속언약’과 연관이 있다.

 

칼빈주의의 전개와 영향력

존 칼빈은 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하였는데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 중 루터는 주로 독일에서 그리고 츠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활동하였다. 종교개혁의 열풍이 유럽 전역으로 번져가면서 개신교의 신학은 점차 칼빈의 신학 쪽으로 기울었다. 그 결과 루터교가 주류로 뿌리내린 독일 및 스칸디나비아의 몇 곳을 제외하고 칼빈주의가 개신교 신학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하여 유럽에 자리 잡은 개신교회가 개혁교회이며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존 녹스가 스코틀랜드에 개혁주의를 전파함으로써 설립된 교회가 장로교이다. 이들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체계화된 신학 사상 및 그 전통을 개혁주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를 개혁교회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칼빈주의 신학을 ‘개혁주의’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초기 미국 이주민들은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네덜란드 이주민들을 포함하여 대부분 칼빈주의를 따르는 개신교회의 신도들 이었다. 네덜란드 이민자들은 17세기 초 남아프리카에도 개혁 주의를 전파하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남아공의 개혁교회는 인종차별이라는 지배질서에 관련하여 바벨탑 이야기에 사람들 이 흩어지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서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아시아 사람은 아시아 사람끼리 흩어져서 살아야 한다는 자의적인 성경해석을 했다.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하는 참된 의미와는 상관없이 백인은 구원이 예정되어 있으나 흑인은 그렇지 않다고 함으로써 개혁파 교회의 교리를 악용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물론 이러한 잘못에 대해 개혁교회에서는 흑백통합정부가 들어선 뒤에 사과함으로써 과거사 청산을 위한 죄 고백을 실천하였다.

칼빈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은 개혁운동의 신학이 사상적 체계를 잡는데 그가 미친 영향이다. 이것은 그의 기독교강요가 갖는 의미라 해도 무방하다. 개혁을 이끈 많은 인물들이 있었지만 결국 개혁교회의 신학은 점차 칼빈 쪽으로 수렴되었고, 지금도 개혁의 전통을 고수하는 개혁주의 신학은 칼빈주의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고 있다. 존 칼빈의 사상은 유럽 교회에도 영향을 주어 프랑스,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잉글랜드 등에 영향을 주었다.

칼빈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가 자신과 이념을 달리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종교적으로 관용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루터와 칼빈이 신학적으로 차이가 있었음에도 서로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을 내세운다.

제네바는 본래 자유스러운 분위기였고 자유가 강조되는 도시였다. 그러나 칼빈은 타락한 사람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 강력한 생활규범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부임하자마자 네 가지 개혁안을 부르짖었으며 신학이 사회 권력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상은 제네바 행정과 사법에 영향을 주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춤, 도박, 주정, 술집 출입의 횟수, 방종, 사치, 접대 행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의복 착용, 음란하거나 비신앙적인 노래 등을 금지하거나 구금형을 가하였다. 심지어는 잔치집의 접시까지 세며 규제했고, 길거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그리고 주민들의 교회 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 교회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1년에 한 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하였다. 이상과 같은 엄격한 규율은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영국의 퓨리턴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의 주된 윤리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렇게 유럽이 점차 교황청의 억압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면서 인문주의도 더 활발해지게 되었는데, 이는 결국 훗날 문예부흥을 불러왔다. 그리하여 신학의 시녀로서 빛을 보지 못했던 철학이 과학적인 방법의 도입과 더불어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대륙의 발견과 함께 박해받던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게 탈출의 기회가 마련되었으며 지금까지 억압받던 노동자와 농민들이 권리를 주장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양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종교개혁 5대 강령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사상은 다섯 가지의 ‘솔라’(Five Solas)로 요약된다.

첫째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다. 진리냐 비 진리냐의 최종 권위는 오직 성경에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성경만이 그리스도 교리의 유일한 원천이며 성경 밖에서 해석할 필요가 없다.

두 번째는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이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으며, 오직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의 죄 값을 다 받고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덧입는 것뿐이다.

세 번째는 ‘오직 은혜’(Sola Gratia)이다. 구원에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효력을 덧입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이 인간 쪽에서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뜻이다.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믿음은 구원의 은총을 받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다. 그리고 행위의 ‘대가’로 구원을 받지 않는다. 오직 은혜의 교리는 인간의 신앙적 행위를 강조하는 업적 의를 비판하는 데 목적이 있다.

네 번째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해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교리 역시 인간의 신앙적 행위를 강조하는 업적 의를 비판하는 데 목적이 있다.

다섯 번째는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Soli Deo Gloria)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내용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내며 우리는 개혁자들의 신앙을 이어받아 ‘오직’의 신앙으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한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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