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학교, 역사신학)

신앙인의 자유는 방종 아닌 자율

▲ 라은성 교수(총신대·역사신학)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해 설명하도록 한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1520년 11월 20일 <기독교인의 자유>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발표했다. 이 글을 읽고 독일 농민들은 귀족들에 대한 불만을 폭발하여 ‘농민전쟁’(1524~1525년)을 일으키게 된다. 또 이 전쟁으로 두 차례의 제국의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두 번째 제국의회, 즉 2차 슈파이어 의회(1529년)에서 ‘프로테스탄트’(저항자)라는 칭호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자유’라는 주제는 교회 역사를 통해 많은 사건과 인물을 상기시킨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칼빈은 칭의를 마무리하는 3권 19장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칭의 개념은 결국 자유에 대한 개념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자유에 대한 기본적 개념
①율법적 의를 잊어버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 칭찬과 복을 기대한다면 율법주의 개념을 뛰어넘어야 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섭리 및 주권에 의해 이뤄진다고 굳게 신뢰해야 한다. 인간의 행위나 행적이 하나님의 섭리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생각이다. 그분은 우리의 인격을 보는 분임을 아직 자각하고 있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기독교강요> 3권 23장 10~11항).

②불필요한 것에 얽매이지 마라. 흔히들 ‘아디아포라’(διφορα)라고 말하는 것인데 갈라디아서 3장 13절과 5장 1~4절에 선언하는 것은 어떤 의식들로부터 자유하라는 것이다. 어떤 이는 구약성경의 의식, 즉 레위지파의 노래 부름, 다윗의 춤, 악기 사용 등을 언급하면서 현대에서 그대로 해야 한다고 억지 주장하는데,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하고 흉내 내는 작태는 제발 멈춰야 한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외형적 의식이나 절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숨기지 말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 의미를 밝혀야 한다. 게다가 각종 절기 행사만 아니라 각 교회가 가공한 각종 프로그램으로 신자의 양심을 힘들게 하는 행위도 멈춰야 한다.

자유와 자발의 개념을 파악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자발적이다. 율법 성취로 의롭다 여겨질 수 없지만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자발성을 발휘해야 한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모든 감정, 생각, 욕망을 버리고 진실어린 심정에서 나오는 애정으로 하나님을 깊게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진실한 자발성을 의미한다(3권 19장 4항). 자발적 순종은 아들일 때 가능하다. 양자 된 자들은 자발적으로 순종한다. 자연스럽게 순종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고, 억지로 또는 의도적으로 행하지 않는다.

신앙고백서에서 말하는 자유
자유에 대한 설명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0장이 유일하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①죄책, 하나님의 진노 및 도덕법의 저주로부터 벗어나는 것 ②사탄과 죄의 주도권에 속박된 악한 현 세상으로부터 인도되는 것 ③환난의 고통과 사망의 독침, 무덤에서의 승리 및 영원한 저주로부터 자유하는 것 ④하나님께 자유롭게 다가가고 어린아이처럼 자발적으로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 하에 있는 신자들도 일반적이었지만 신약 하의 기독교인은 의식법의 멍에로부터 자유케 되었다고 한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했기 때문에 어떤 율법적이고 의식적인 것에서 우리 양심을 가둬선 안 된다는 것이 자유에 대한 기본적 개념이다.

잘못 사용되는 자유
자유를 구실로 죄를 범하는 기회를 삼거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려는 간교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방종일 뿐이다. 그렇다고 맹종이나 맹신은 양심의 자유를 저해한다. 자유는 자발을 의미하기에 자연스러운 순종과 신뢰는 자유를 강화시킨다. “자유의 목적은 하루하루를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헌신하는데 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0장 3항). 신앙고백서는 계속적으로 이런 방종을 강력하게 금한다. “기독교의 일반 원리들에 모순되거나 경건의 능력에 반대되는 견해들을 발표하거나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경우, 잘못된 견해들이나 관습들을 행사하는 방법 면에서 본질상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설립하신 외적 평화와 질서를 파괴하는 경우, 그들은 합법적으로 책임 추궁을 당할 것이고, 교회의 견책들을 받거나 고소를 당하게 된다”고 경고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0장 4항).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
흔히 이것은 ‘아디아포라’라고 불리는 것으로, 성경적이거나 교훈이라 하면서 교회에서 정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제도, 행사와 같은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 지켜야할 의무가 기독교인에겐 없고 자유롭게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자유가 연약한 신앙을 가진 자에게 상처나 죄를 범하게 한다면 그런 자유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기독교강요> 3권 19장 10~13항). 자유 또는 합법적이라는 미명 하에 방종을 일삼는다면 그야말로 자유는 그를 멸망의 길로 걷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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