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전 루터가 어린 시절 로마 교황에 오른 사람 중 알렉산더 6세(Pont 1492~1503)가 있다. 이 사람은 ‘스페인의 건달’로 불리우는 중세 천년에서 가장 악명 높은 교황이었다. 본명이 로드리고 보르기아(Rodrigo Borgia)인 이 사람은 스페인의 발렌시아(Valencia) 출신이다. 그는 단 하루도 사제로 일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삼촌으로 교황이었던 칼릭스투스 덕에 추기경에 임명되어 교황청에 입성하였다. 알렉산더 6세는 추기경과 주교 직위에 자신의 아들, 사위, 조카, 심지어는 자기의 정부까지도 요직에 앉히는 족벌주의(Nepotism)로 교황청을 운영했다.

1400년대 시작된 교황청의 족벌주의는 한 세기 이상 지속되었고 1692년에 만들어진 법에 의하여 교황은 딱 한 명의 친척만 추기경에 임명할 수 있다는 규정이 생기면서 감소되었다. 이렇게 신학도 안 한, 사제가 아닌 사람인 스페인 건달이 교황이 되면서 교황청은 ‘강도들의 천국’이 되고 있었다. 이 사람 보르기아가 그의 삼촌에게서 배운 일은 ‘협잡’ 바로 그것이었다. 알렉산더 6세가 교황으로서 한 일은 재산축재와 악행이었고 그의 관심사는 매일 벌어지는 환락파티와 춤추는 창녀들을 따라잡는 놀이였다. 알렉산더 6세는 잔인한 인물로 자신을 비판한 피렌체의 개혁자 사보나롤라도 화형 시킨 사람이었다. 그의 일가친척들은 주교와 추기경 직책들에 임명되었고 이런 와중에서도 알렉산더 6세는 면죄부를 팔면서 축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교황청을 바라보면서 “로마는 이제 강도들의 천국이 되었다”고 했다.

1503년 역사상 가장 후안무취였던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정적의 손에 의해 피살되므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사람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 마치 중세의 죽음을 상징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가족을 빼고는 단 4명만 참석한 가운데 안장되었다. 그의 시신은 성베드로 대성당 지하에 있는 교황들의 묘지에서 쫓겨나야 했다. 이 사람에 대한 다음과 같은 참담한 추모사에서 그의 생애에 대한 평가를 보게 된다. “증오와 투쟁의 마음으로 살았고, 싸움과 대결과 살육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 죽어서 오히려 모든 이를 기쁘게 한 그가 여기 누웠노라” 그랬다. 그의 죽음은 전 로마 시민들에게 안심을 가져다준 것이었기에 죽어서 모든 이를 기쁘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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