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섭 목사(대대교회)

바람이 불면 순천만은 새벽을 선물한다

<무진기행>의 안개가 자욱한 순천만 포구는 환상적인 ‘신비의 성’이다

▲ 공학섭 목사(대대교회)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단편소설 <무진기행>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무진기행>의 저자 김승옥 작가는 소설 속에서 순천만 포구를 소재로 삼았다. 무진이란 ‘안개 무(霧)’에 ‘나루 진(津)’, 곧 안개나루라는 뜻이다.
물론 <무진기행> 속에 등장하는 안개는 자연 현상으로서의 안개가 아니라, 사람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허무의식을 드러내는 상징물로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도 순천만 나루는 안개가 명물이다. 이른 새벽 순천만 포구에 나가보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처럼 안개들이 순천만을 삥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무 때고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을 사는 사람들은 나루터에 안개가 몰려오는 날을 용케도 잘 알아맞힌다.

안개가 자욱한 날 우리 마을에서 순천만 나루를 바라보면 어찌나 아름다운지 “저건 신비의 성이다”라며 탄성을 지른다. 어떤 이는 안개로 둘러싸인 순천만을 바라보며 ‘동화 속의 나라’라고 부르고, 어떤 이는 “몽환적이다”라고 경탄을 아끼지 않는다. 순천만의 새벽은 한 마디로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진기행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으니 저자인 김승옥 작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작품을 현대문학의 출발점으로 삼을 정도로 김승옥 작가는 우리나라 문단에서 각별한 위치에 있다. 그는 문학인인 동시에 많은 영화를 만들어 대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 군부독재 시절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먼지의 방>을 연재하다가 중단한 이후 절필했다. 그러다가 다음해 신앙적 계시를 받는 극적인 체험을 했고, 그 후로도 몇 차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을 했다. 2004년에는 ‘내가 만난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신앙체험을 담은 산문집을 내기도 했다.

김승옥 작가는 주말이면 순천만문학관에 머무르며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난다. 오래 전 얻은 병으로 언어신경이 회복되지 않아 필담으로 얘길 나누고 있다. 그는 문학인이면서 신앙인이기에 나는 목사로서 그와 가끔씩 교제를 나누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의 할머니가 필자와 같은 종씨여서 더욱 인연이 두텁다. 그는 우리 교회에서 신앙 간증도 했고, 책 사인회를 가진 적도 있다. 김승옥 작가는 현재 인도선교를 꿈꾸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건강이 따라줄 것 같지 않은데 선교비전을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다.

순천만과 <무진기행>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순천만의 새벽안개를 경험하기 위해 나섰거든 문학관까지 연결된 무진길을 따라 걸어보기 바란다. 순천만 포구에서 문학관까지는 도보로 15분 정도면 충분하다. 순천만에서 문학관까지의 무진길을 걷다보면 강줄기를 따라 무성하게 자란 갈대밭을 덤으로 볼 수 있다.

이제 바람 부는 날 순천만의 새벽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바람이 부는 날엔 안개가 없다. 대신 청명한 새벽을 선물한다. 그리고 바람 부는 날엔 또 다른 명물을 만난다. 그건 다름 아닌 갈대소리다. 갈대는 바람이 불어야 소리를 낼 수 있다. 바람에 흔들리며 몸을 부비는 갈대소리를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이 세상의 현란한 첨단기술을 다 동원해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소리를 흉내 낼 수 없으리라.

▲ 안개 낀 순천만의 새벽은 몽환적이고 신비롭다. 김승옥 작가는 이 안개를 소재로 소설 <무진기행>을 집필했다.

순천만의 새벽은 바람이 불지 않는 날도 좋다. 바람이 없는 날이면 드넓은 갈대밭이 무덤처럼 조용해진다. 바람까지 침묵하는 새벽이면 맑고 청아한 새소리가 또렷하게 들여온다. 몇 마리가 노래를 하는지 알아낼 정도로 정확하게 들을 수 있다. 게들의 발걸음까지도 들릴 정도다. 낮 시간에는 많은 방문객으로 인하여 자연의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새벽시간이면 모든 자연의 소리를 한꺼번에 들을 수 있다. 이른 새벽 아무도 걸어보지 않은 갈대밭 데크 위를 걷는 기분은 레드카펫을 사뿐하게 걷는 여왕도 부럽지 않다.

어느 관광지든 사람 구경도 한 몫을 한다. 그러나 순천만은 사람이 많은 낮 이 좋은 시간이 아니다. 그래서 순천만의 새벽 또는 아침을 추천한다. 이른 시간이 좋은 이유는 사람 소리가 섞이지 않아 자연의 소리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순천만의 자연생태를 제대로 만끽하려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시간은 피해야 한다. 순천만은 사람을 구경하는 곳이 아니라 자연을 보고 느끼는 곳이다. 따라서 방문객이 없는 시간일수록 좋다.

그런데 문제는 이른 아침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한 가지 팁을 제공한다. 입장 시간 이전에는 순천만문학관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면 된다. 문학관은 입장료를 받지 않기 때문에 아무 때나 문을 열어 둔다. 문학관 가는 길만 걸어도 순천만의 새벽을 누리는데 큰 지장이 없다. 또 다른 방법은 공식적으로 허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새벽시간 순천만을 산책하는 주민들과 함께 동행하는 방법이다. 한두 명일 경우에는 제재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해 둘 것은 개장시간 이전 출입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위법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낮 시간 순천만을 호젓하게 누리는 방법은 없을까? 낮 시간에도 조용한 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오는 날이면 방문객이 드물어 자연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순천만이 가장 매력적인 것은 새벽안개 다음으로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의 풍경이었다.

언젠가 몽골에서 온 선교사님 가족을 안내하는 중 갑자기 내린 소낙비 때문에 작은 원두막에서 비가 멈출 때까지 얘길 나누었다. 비가 오자 모든 사람들이 철수하고 선교사님 가족과 나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그 순간은 순천만 전부를 차지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송두리째 만끽할 수 있었다.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순천만의 원두막을 떠올린다. 순천만과 가장 잘 어울리는 날은 비오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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