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주필

기독교 신앙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고 믿었던 사람이 샤를마뉴 대제였다. 샤를마뉴에게 문명과 선교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그는 교육의 핵심내용도 성경기초지식을 포함하였다. 그는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지 않았고 겸손한 태도로 하늘의 도움을 구했던 사람이었다.

샤를마뉴(칼대제)는 741년 부활절에 지금의 벨기에 리에주(Liege)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구이며 ‘샤를마뉴의 생애’를 저술한 궁정학자 아인하트는 샤를마뉴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샤를마뉴는 190cm나 되는 큰 키에 목이 굵은 거구의 사람이었고 지용을 겸비하였다고 한다. 1861년 그의 유골에 대한 법의학 분석 결과 전승으로 내려오던 그의 골상학적 정보가 사실임을 확인시켰다. 샤를마뉴는 중세 유럽의 최고 정복가였다. 그는 재위 45년간 50회나 되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무패의 명장이었다. 그는 이때까지 프랑크에 복속되지 않았던 독일의 북부 색슨을 굴복시켜 독일 지역을 프랑크 왕국이 되게 한다.

샤를마뉴는 776년부터 20년이 넘도록 강력하게 색슨족 정벌에 나선다. 이들 색슨족은 야만적 문화와 전투적 성향을 지닌 부족으로 100여년을 넘게 주변 국가를 괴롭힌 족속들이었다. 샤를마뉴의 색슨 원정은 종교원정이기도 하였다. 색슨족의 기독교 개종은 중대한 역사적 변화를 가져왔다. 코르베이, 파더보른, 뮌스터에 대성당이 세워지고 이곳에 도시가 건설되면서 학교를 중심으로 독일의 문예부흥이 일어났다. 그리고 100년 후 색슨족은 오토왕조를 배출 신성로마제국을 태동케 한다. 훗날 이 색스니의 학문도시 비텐베르크는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된다.

샤를마뉴는 온천도시 아휀을 수도로 삼고 카롤링커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게 한다. 샤를마뉴는 각국의 대학자들을 프랑크 왕국으로 초빙하여 학문연구를 장려하였다. 당시 초빙된 학자들 중 으뜸인 사람은 영국 요크의 집사 출신 알쿠인이었다. 프랑크 왕국의 수도 아휀의 궁정학교 교장이었던 그는 교육정책을 총괄하였고 문법, 수학, 법률, 성경등을 교과과목으로 교육하였다. 샤를마뉴는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을 즐겨 읽었고 신국의 비전을 자신의 왕국에 실현코자 노력한 현제였다. 814년 73세의 대제는 그 해 1월 28일 주의 손에 내 영혼을 의탁하나이다(시 31:5)라는 사제의 성경구절을 들으며 영면했다. 그리고 그의 육신은 아휀 대성당에 안장 되었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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