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진 목사(빛과진리교회)

영원하지 않은 것을 적극 버려야 합니다
세상의 무엇이 예수님보다 귀하게 여겨질 때는 즉각 멈춰서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3~14)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랑을 받고 싶어합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인격을 가지고 계신 분이므로 그 분도 지극히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삼상 2장 30절에서 주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존중히 여긴다’는 히브리어로 ‘카바드’라는 동사인데, 명사형은 ‘카베드’로서 우리 몸 속 장기인 ‘간’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장기를 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누군가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고 한다면 간처럼 여긴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존중한다는 의미는 내 삶 속에서 주님을 ‘최고로 여긴다, 가장 가치 있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경멸히 여긴다는 말은 ‘바자’인데, 이는 ‘목을 꼿꼿이 세운다’는 말입니다. 마치 위에서 하나님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본다는 것이죠.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도 그를 멸시하시는데 이는 그를 ‘작은 먼지처럼 여긴다’ ‘주님께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또한 카바드는 피엘형 동사로서 강조와 반복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중하게 여긴다는 말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계속 반복적으로 귀하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평생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겠다는 최고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그 이름을 존귀케 해 주시며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대적들을 내 앞에서 없애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0절에는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히브리라는 말의 어근은 ‘이동한다’ 라는 뜻인데, 실제로 히브리인들은 거주지를 자주 옮겼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을 귀히 여기는 자들에게 ‘정착해서 살아라’ ‘더 이상 이동할 필요가 없다’며 축복을 해주십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점점 알아가게 되면 물질적으로도 어느 정도 보장해 주신다는 뜻이지만,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다 보니 물질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므로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됩니다.

왕이 된 후 다윗에게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12부족 중에 다윗을 따르는 부족은 유다족속 뿐이었고 나머지 11부족은 사울 편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죽고 나면, 사울의 측근들이 자신의 가족을 다 죽이고 다시 사울 왕권을 세울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오늘 본문 12절 말씀이 그에게 있어선 앞에 해주신 말씀들보다 더 큰 위로와 축복이었을 것입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사실 저도 은퇴를 생각할 때마다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제가 은퇴한 후에 우리 교회가 지금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또한 제 슬하의 두 자녀를 향해서도 간절한 기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내가 자녀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소중히 여겼을 때,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책임지신다는 겁니다. 다윗이 이것 때문에 얼마나 염려했던지 하나님께서는 12절에 이어 13절에서 다시 한 번 자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3)

14절은 신학교에서도 소중히 여기는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전까지는 백성들에게 ‘아들’이라고 표현한 적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윗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다는 예언적인 내용도 됩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도 다윗의 이름이 족보에 나오고, 그 대의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합니다. 히브리서 1장에서도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근거로 인용됩니다. 다윗의 후손을 통해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왕국이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전세계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입니다. 다윗은 왕이 된 체통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열렬히 춤을 췄던 사람입니다. 또한 부유하게 됐을 때 초라해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향하여 기특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이는 다윗이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모하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에게 하나님보다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직 하나님만 있으면 되었던 사람이기에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반면,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경멸했던 사울 가문은 모두 없애버리셨습니다.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사울은 하나님보다는 자기 권력을, 자녀를, 백성들을 더 사랑했습니다. 잘못을 했을 때, 군신관계는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지만 다윗과 그 후손과 같은 부자지간은 사랑의 채찍을 대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다윗이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 그 자체에 대해서만 책망하시지 근본적인 관계성에 있어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다윗처럼 예수님을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탁월한 분으로 모시는 방법이 뭘까요? 신약에 그 방법을 제시해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부유한 최고의 가문에서 태어나 엄청난 고학력에, 모든 것에서 완벽하게 율법대로 살았다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7~8)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가치이므로 그리스도를 온전히 얻기 위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배설물은 사람이 음식을 먹으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인데,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배설물들은 계속 품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 영원히 나와 함께 할 수는 없는, 버려야 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녀, 학식, 재물, 인격, 지인 등 인생의 소중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대변해주는 것들이지만, 죽음과 함께 사라질 것들이기에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영원한 것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도리어 적극적으로 버리는 훈련을 한 것입니다. 만약 명예나 권세가 귀하게 여겨지면, 저는 의도적으로 버립니다. 구체적으로 세상에 눈길이 가려는 순간, 오히려 말씀을 보는 거죠. 내 자녀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질 때, 자녀들에게 “나는 주님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 너도 나보다 주님을 소중히 여겨라” 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윗도, 바울도 이런 훈련을 계속 했기 때문에 각각 구약과 신약에서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언가가 예수님보다 귀하게 여겨질 때 멈추십시오. “내가 이것 때문에 예수님을 깊이 받아들이는데, 아는데 문제가 생기겠구나” 이런 마음이 들 때 오늘의 본문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갖게 될 것이고, 이 세상에서 감당할 수 없는 그런 풍성함과 기쁨이 물밀듯이 다가올 것입니다. 배설물에 대한 결단을 통하여 이를 경험해 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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