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역사신학)

말씀을 배워 삶을 재정비하다

 

‘성수주일’이란 단어는 한국교회에 익숙한 단어이다. 이전에 이 단어의 의미는 금전 거래와 개인 일을 멈춰야 한다는 것으로 인식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예배당에 머무르는 자들은 정말 힘든 노역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이 개념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이 성수주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이 게을러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럴까? 우리는 ‘성수주일’이란 개념을 “무엇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무엇을 하라”는 개념엔 무관심하지 않나? 우리가 금하는 것에만 치중한 나머지 행해야 하는 것을 상실해 대중에게 비난을 받고 있지는 않나? 실제로 개혁신앙 또는 보수신앙은 <주홍글씨>의 저자 너태니얼 호턴(Nathaniel Hawthorne, 1804~1864년)의 비아냥거리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의 소설들은 청교도에 대한 부정적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지만, 보수적 신앙을 가진 자들의 그릇된 외식과 가식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진정한 개혁신앙 또는 청교도신앙이 바라는 ‘성수주일’의 개념에 대해 이번 기회에 분명히 알고 가야 하겠다.

‘성수주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4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로 수정하여 물을 수 있다. ①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때까지 7일째 되는 날을 정하셨고, 부활 이후로는 주일의 첫 번째 날이었고, 세상 끝날 까지 지속되는 날을 정하셨다. ②정하신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116문). 안식일 또는 주일 지정은 인간이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히 지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안식일이 주일이라는 날로 부른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부터는 한 주간의 첫 날로 바뀌었고 이 날은 세상 끝날 까지 기독교인의 안식일로 지속되어야 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7항). 안식일은 기독교인이라면, 또는 중생된 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해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되는 날이 결코 아니다. 안식을 7일 중 어느 한 날이면 되지 않느냐는 자유주의적 신앙에 대해 개혁신앙은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임의적으로 요일을 정하거나 조정해서도 안 된다.

‘거룩하게’ 지킨다는 의미는? 이 질문은 “성수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라는 의미와 같은 질문이다. “자신들의 심정을 정하여 준비하고, 미리 일상적인 일들을 정리하고 자신들의 일들, 세속적인 말들과 생각들, 오락들을 중단하고 하루 종일 거룩한 휴식을 준수해야 하고, 그분께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예배하는 일과 필요한 임무를 행사하고 자비를 베푸는 일을 해야 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8항).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두 단어가 있는데 ‘하루 종일’이란 단어이고, ‘예배’라는 단어이다. 주일에는 예배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예배를 풀이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거룩한 성례가 사용되고, 주님께 다함께 도움을 청하고, 그리고 기독교인의 자선을 위하는 것”이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103문). 이것은 지상에서 영원한 안식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또 예배를 영어로 서비스(service)라고 하지만 그 의미는 봉사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서비스의 본래 뜻은 ‘종 됨’(servitude)라는 의미다. 따라서 예배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종임을 알고 명령 또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것에 관해 칼빈 선생은 4계명을 지켜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하는데 ①영적 쉼 ②말씀을 배우고 성례를 집행하는 것 ③일상적인 노동에서 쉬는 것이다(<기독교강요> 2권 8장 28항).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영적 쉼’이다. 육적 쉼이 아니라 영의 쉼이다. 영이 쉰다는 것은 육의 쉼과 전혀 다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라고 하셨다. ‘영적 쉼’이란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는 것이다. 자기 부인의 길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우리의 삶을 재정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주일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배우는 일과 예배드리는 일이 우선순위이며, 이웃을 돌아봐야 하는 일은 이차적임을 알 수 있다. 영적 쉼이란 정신적 쉼도 아니고 육적 안락도 아니다. 영의 기능을 회복하는 일로서 말씀을 따라 마치 자동차의 바퀴를 정렬하는, 즉 휠 얼라인먼트(wheel alignment) 하는 일이다.

4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선 금지해야 하는 일이 있다. 요구된 임무를 생략하거나 부주의하게 실행하고, 게으르므로 그날을 모독하는 것을 금한다. 또한 죄악 된 일을 행하고, 세속적 일들이나 오락들에 대해 쓸데없는 생각이나 언어들 또는 그날을 모독하는 것을 금한다(<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61문). 한 마디로 육적 쉼을 금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적 피곤은 영적 쉼을 통하여 언제든 회복될 수 있다. 육체적 방법으로 육적 쉼이 허락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육적 쉼을 토요일에 가능하다. 주일엔 온종일 그분의 날로 준수해야 한다. 특별한 경우에 육적 쉼이 필요할 수도 있다. 몸이 아픈 경우엔 예외로 봐야 한다.

‘기억하라’는 말씀을 강조하는 이유는? ①그것을 기억할 때 많은 혜택이 있기 때문이고 ②그날을 지키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아 그것을 지킬 때 나머지 모든 계명을 더 잘 지키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사탄은 자기의 수단을 동원하여 그 영광뿐만 아니라 그날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모든 불신앙적이고 불경건함을 심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121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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