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주필

일찍이 네덜란드인들은 미 동부 허드슨강 하구에서 뉴네덜란드를 시작했다. 그 곳이 바로 맨해튼 섬이었는데 이곳에 뉴암스테르담 타운을 세웠다. 지난 날 흔히 부르는 미국인들에 대한 별명 양키(Yankee)는 영국 사람들이 네덜란드인들을 부를 때 사용했던 이름이다. 양(Yan)과 키(kee)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흔한 성씨이다. 양은 영어의 존(John)과 같은 이름이고 키는 치즈를 뜻하는 네덜란드어 카스(kass)에서 유래된 것으로 목축업자들의 성씨였다. 그렇지만 미 대륙에서 양키는 뉴네덜란드 주민만이 아닌 뉴욕 주에 사는 모든 백인들에 대한 이름이다.

양키에 대칭되는 것이 남부 백인들에 대한 명칭인 딕시(dixie)였다. 프랑스어로 10을 뜻하는 딕시라는 화폐를 남부 주민들이 만들어서 생긴 이름이었다. 맨해튼 즉 뉴암스테르담을 세운 사람은 네덜란드의 퇴역 군인 스튜이베산트(Peter stuyvesant. d. 1672)였다. 그는 맨해튼 섬에 성벽을 세우고 여기에 길을 낸 것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월스트리트(wall street)이다. 즉 성벽도로란 뜻이다. 이 섬을 가로지르는 넓은 길도 만들었는데 이것이 맨해튼의 상징거리인 브로드웨이(Broad way)이다.

무역에 뛰어났던 네덜란드인들은 맨해튼을 교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당시 타 주 사람들은 월스트리트를 따라 들어선 상가에서 물품을 구입하였고 브로드웨이의 술집과 호텔은 저들 나그네들의 대표적 유흥장소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시절 장로교 신자였던 스튜이베산트는 맨해튼의 뉴암스테르담이 지나친 환락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엄격한 규율을 세웠는데 그것은 일요일에 주점을 철시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민들에게 신앙을 가르쳤고 교육에 재정을 투자하여 맨해튼의 아동들을 무상으로 교육시켰다.

1664년 뉴암스테르담의 운명을 바꾸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본래 영국과 네덜란드는 우호적 관계였는데 찰스 2세가 스페인을 지지하면서 관계가 악화된다. 찰스 2세는 신대륙의 뉴네덜란드 지역을 영국 영으로 선포하고 자기 동생 요크(yoke)공작에게 선물했다. 요크 공작은 뉴암스테르담의 실효지배를 위하여 군함을 보내 맨해튼을 포위한다. 이 때 스튜이베산트는 저항을 포기하고 영국군에 항복하면서 뉴암스테르담은 요크의 땅이라는 뉴욕주(New Yoke State)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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