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주필

요즘 이 나라는 커피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커피점이 거리마다 동리마다 넘쳐나고 있다. 일찍이 은둔의 나라 조선은 커피를 통해 세계와 만난다.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숍은 1902년 서울 정동에 세워진 손탁호텔 1층의 서양식 식당이었다. 당시 고위 관료들을 통해 정동구락부라는 사교모임이 만들어지기도 했던 손탁호텔 커피숍은 세계와 만나는 창구이기도 했다.

커피는 1886년 조선에 들어온 외교관과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공사 알렌이 정부고관들을 정동의 자택으로 초대해서 커피를 대접했다. 커피는 이렇게 당시 선택받은 조선 엘리트들에게 전해졌다. 당시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세계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새롭게 질서가 재편되고 있었다. 청의 정치적 속박에서 벗어나려던 고종은 을묘사변이란 큰 정치적 시련을 맞았다. 을묘사변으로 아내 명성황후를 자신의 궁궐에서 잃어버려야 했던 고종은 아관파천이라는 전대미문의 정치적 사건 속에 빠져들었다. 궁궐보다 러시아 공사관이 더 안전하다고 믿고 당시 친러파의 거두 이범진의 주도 아래 비빈이나 타는 교자에 몸을 실은 채 궁을 빠져나갔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황제 고종은 커피 맛에 깊이 빠졌다.

당시 커피는 영어 발음을 따서 가배차라고 불렀다.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 간 고종과 세자는 러시아 공관에서 머물다 경운궁으로 환궁하는데 이후에도 고종은 커피를 계속 찾는다. 이 때 고종은 경운궁에 ‘정관헌’이라는 서양식 찻집을 짓고 커피를 마시며 외국 공사를 접견했다. 커피에 매료된 고종은 커피 때문에 목숨을 잃을 번한 사건이 발생한다. 한 때 세도를 부리던 김홍륙이 권세를 잃은 것을 빌미로 커피에 아편을 타 고종을 독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커피가 일반인에게 전해지는 계기가 있었는데, 1900년대 초 프랑스 상인으로 고양군에서 나무장사를 하던 부래상이란 사람으로부터였다. 당시 보온병에 커피를 담아 나무꾼들에게 커피를 한 사발씩 돌렸다는 것으로 유명해졌는데, 당시 커피는 나무를 독점하기 위한 판촉물 같은 것이었다. 그 시절 나무꾼들은 색이 검은데다가 쓴 맛이 나는 국물 맛에 이것을 한약 같다고 해서 양탕국이라 불렀다. 당시 양탕국 한 사발이 녹용보다 더 좋은 보약이라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커피는 이렇게 이 땅의 민초들과 만남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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