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주필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 젊은 선교사 부부가 삼정의 문란으로 국운이 쇠하던 조선에 파송되었다. 저들의 사역지는 충남 공주였다. 그리고 이 땅 인천에서 얻은 첫 아들의 이름을 ‘우광복’이라고 짓는다. 이 나라의 광복을 염원하는 마음에서였다. 이어 올리브와 로저라는 두 딸을 낳았다.

1906년 2월 논산 지방에서 사경회를 인도하고 돌아오던 선교사 윌리엄은 쏟아지는 비를 피하려고 길 근처의 상여집으로 몸을 피했다. 이곳의 상여가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들의 장례를 치른 줄을 모르는 선교사는 비가 그친 후 이곳을 떠난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예기치 못한 병으로 남편을 여윈 선교사 부인은 졸지에 과부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놀라운 사실은 2년 후 윌리엄 선교사의 부인이 자녀를 데리고 다시 공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두 딸마저 풍토병에 걸려 영명동산에 묻혔다. 인천에서 1907년에 태어난 우광복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조부모가 있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로 가서 고등학교와 의과대학을 마쳤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 조선이 해방을 맞고 신탁통치가 시작될 때, 하지 장군의 통역관으로 재차 내한했다. 당시 하지 장군은 한국말과 영어를 할 줄 아는 통역관이 필요했다. 이 때 하지를 도와 이 땅에 온 통역관이 우광복이었다.

군정시절 미군 중령 군의관으로 통역사의 일을 맡은 우광복에게 하지 장군은 다음과 같은 요청을 했다.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 50명을 추천해 달라.” 이 때 우광복은 50명의 엘리트를 추천했고, 이들은 이후 한국정부수립에 관여했다. 당시 우광복은 어머니와 상의한 후 50명을 추천하였는데, 놀라운 사실은 48명이 기독교인들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수립될 때 요소요소마다 기독교인들이 활동했다.

1948년 5월 30일 제헌국회의장 이승만은 제헌의원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로 국회를 열 것을 주문했다. 당시 기독교인이 5%였던 이 나라에 윌리엄 선교사 사모와 우광복이 추천한 50명이 건국에 영향을 끼쳤고, 이 숫자는 10년 만에 500만으로, 20년 만에 1000만이 되는 기적의 역사로 나타났다.

우광복은 1994년 87세로 영면했고 그의 유해는 11살에 세상을 떠난 동생 올리브가 묻혀 있는 공주의 영명동산에 안장되었다. 그의 유언대로였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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