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생각과 바른 신앙으로 가난 극복한 서희건설 이봉관 회장 “모두 하나님의 은혜”
삶의 역경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과 대화한 기록을 모아 <CEO의 기도>로 출판

 

이봉관 회장은… 1945년 출생했다. 1946년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왔지만, 조모를 데리러 북한으로 떠난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해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다. 교회 주일학교 교사와 선교사의 도움으로 늦은 나이에 학업을 시작해 경주문화중·고등학교, 경희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순천향대학교 명예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0년 포스코에 입사해 근무하다가 운송업체 유성화물을 설립하여 사업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유성티엔에스로 확장한 회사는 코스닥에 상장, 5천억 원 매출 규모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1994년 서희건설을 설립해 건설업에 도전, 20년 만에 매출 1조원 시공 능력 30위에 이르는 중견기업으로 키웠다.

국내 건축 현장은 전쟁터를 방불할 정도로 치열하다. 그 경쟁 속에서 시공능력 30위(2015년 12월 30일 현재)에 올라있는 ㈜서희건설. 업계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서희건설은 수많은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한국교회에도 친숙한 회사이다. 창립 이후 서희건설은 외환위기(IMF)와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촉발된 세계금융위기와 지금도 영향을 미치는 유럽 발 금융위기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매출 1조5000억원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서희건설을 설립한 이봉관 회장은 강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인생의 힘든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은 그때마다 나를 위로하시며 힘과 용기를 주셨다. 내가 기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7살 소년, 가장이 되다
이봉관 회장은 해방둥이이다. 1945년 3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 회장은 이듬해 가족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할머니를 모시고 온다며 다시 북한으로 넘어간 아버지는 돌아오지 못했고, 가족은 이때부터 가난과 고난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장을 잃어버린 가족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뿐이었다.

“어릴 때 내가 죽을 정도로 아팠던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하나님께 나를 살려달라고 기도하시면서 ‘관이만 살려주시면 북한에 있는 남편이 돌아오지 못해도 좋습니다’라고 하셨다. 이후 어머니는 내가 살아있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셨다. 7살 어린 나이였지만,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집안은 내가 일으켜야 한다’는 가장의식이 생겼다.”

7살 소년이 짊어지기는 너무 힘든 가장의 역할. 그러나 이봉관 회장은 다른 집에 땔감을 마련해주고 모내기일을 돕는 등 ‘가장의 역할’을 했다. 아무것도 없는 빈궁한 생활 속에서, 이 회장의 재산은 어머니의 사랑과 굳건한 신앙뿐이었다.

희망은 하나님에게서 왔다. 힘들어도 교회에 다니며 굳건히 신앙을 지키던 이봉관 회장은 주일학교에서 한글을 깨치고, 교사들의 권유로 학교에 입학했다. 늦은 나이에 학업을 시작했지만, 남다른 지혜와 노력으로 한 학기만에 우등생이 됐다. 하지만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 닥쳤다. 그때 이 회장의 손을 잡아준 사람이 레이몬드 프로보스트 선교사였다. 프로보스트 선교사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 한 이 회장은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까지 마련하면서 기어이 대학까지 졸업하고 포항제철(현 POSCO) 공채2기로 입사하며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 “삶을 살아오면서 어려움과 고난을 만났을 때 그리고 사소한 일상까지, 항상 기도하면 기쁨과 평안을 느꼈다. 나는 기도를 통해서 인생의 아무리 큰 문제도 하찮은 문제로 여길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의 기도문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인 동시에, 내가 생각하고 하나님과 대화한 삶의 모든 것이었다”

 다른 생각, 바른 신앙
그리고 은혜

남들이 부러워하는 번듯한 직장 생활을 이어가던 이봉관 회장은 운수업체 유성화물을 설립하며 사업의 길에 들어섰다. 이어 1994년 서희건설을 설립하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대기업에서 평탄하게 살 수 있었지만 “새로운 희망에 대한 도전의식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그를 미지의 영역으로 이끌었다.

경쟁이 치열한 건설업계에서 이봉관 회장은 남들과 다른 생각으로 접근했다. 당시 학교와 병원과 교회의 예배당 건축은 건설사들이 기피하는 공사였다. 규모가 큰 대신 공사의 난이도가 높고, 무엇보다 공사에 관여하는 사람이 많아서 건설회사들이 꺼렸다.

하지만 서희건설은 ‘다른 생각’으로 접근했다. 힘들고 손해를 보더라도 사회에 꼭 필요한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 이 땅의 곳곳에 서희건설의 이름으로 예배당을 건축한다는 믿음으로 공사를 맡았다. 

“건설회사로는 유일하게 전국에 대형 교회 40여 개를 건축했다. 이윤을 생각하지 않고 예배당을 건축했더니 당당히 건설업계에서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됐다. 또한 예배당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서, 정성과 정직을 기울여야 한다. 편법이 용납될 수 없다. 이 덕분에 서희건설은 ‘정직한 건축을 한다’는 바른 생각을 고수하게 됐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

 “나는 나약한 사람, 하나님 덕분에”
이봉관 회장은 지금도 가난한 생활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교회라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만난 주일학교 교사와 선교사의 도움으로 ‘선교사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할 수 있었고, 이것이 삶의 새로운 빛이었다고 말한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유년시절에 ‘새로운 삶의 빛’을 받았던 것처럼, 이봉관 회장은 지금 ‘사랑의 빚’을 갚고 있다.

“어린 시절의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학생들에게 학업의 기회를 주기 위해 모교에 장학금을 내고 있다. 이외에도 사회공헌활동의 일환으로 불우한 이웃을 지원하기 위해 ‘새둥지봉사단’을 결성했고, 임직원들은 노인요양시설 사회복지시설 등에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 이봉관 회장은 자신의 인생역정과 하나님의 은혜를 진솔하게 고백한 책 <CEO의 기도>(와웸퍼블)를 출간했다. 이 회장은 <CEO의 기도> 1부에서 인생의 역경과 고난 속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담담하게 간증한다. 이어 2부에서 5부까지 교회 등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문을 담았다. 책에 기도문을 넣은 것이 생소하겠지만, 이 회장은 기도문이 곧 자신의 삶이라고 말했다.

“삶을 살아오면서 어려움과 고난을 만났을 때 그리고 사소한 일상까지, 항상 기도하면 기쁨과 평안을 느꼈다. 나는 기도를 통해서 인생의 아무리 큰 문제도 하찮은 문제로 여길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의 기도문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인 동시에, 내가 생각하고 하나님과 대화한 삶의 모든 것이었다. 내 기도문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펴냈다.”

이봉관 회장은 스스로 “농사일을 하며 나약하고 무능하게 살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됐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 고백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굳은 신앙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을 믿고 의지한 하나님을 우리도 같은 믿음으로 따라야 한다고 외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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