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사의 굴욕은 향후 200년간 교황의 시대를 열게 한다. 결국 이런 상황 속에서 1200년대는 교황이 국왕과 황제 선출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교황은 유럽의 최고 군주로 등극하면서 두 세기 동안을 그들의 세대로 만들었다. 간혹 교회사를 잘못 아는 사람들은 1000년의 중세가 교황이 최고의 군주인 것으로 알지만 사실과는 먼 이야기이다. 1075년 그레고리 7세는 교황칙령(Dictatus papae)를 발표한다. 카노사의 굴욕이 있기 2년 전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로마 교회만이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교황 아래 모든 군주들은 엎드려야 한다. 교황의 이름만이 세상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이름이다. 교황은 황제를 폐위할 수 있다. 교황의 승인 없이는 어느 책도 정경이 되지 않는다. 교황은 공의회 소집 없이 언제나 주교를 면직할 수 있다.” 교황 그레고리 7세는 권력 신장을 위해 세 종류의 무기를 사용하였다. 첫째, 군사적 수단으로 십자군이었고 둘째, 종교적 무기로서 파문이나 예배금지령이었고 셋째, 사법적 도구로서 교회법이었다. 중세는 교회법이 사회를 통제하고 있었다. 한편 그레고리 7세를 제압한 하인리히 4세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북부와 독일 남부는 여전히 황제에게 저항했는가 하면 심지어 자신의 아들 콘라트가 이 반란군에 합류한다. 그는 독일의 왕이면서도 수년 동안 아휀에 있는 궁정에 발을 들여놓지 못한 채 불우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하인리히 4세는 새 교황과도 갈등을 빚으며 또 파문을 당한다. 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왕자 하인리히 5세도 부친에 반기를 든다. 갖은 수모와 고생 끝에 4년의 방황생활을 끝내고 독일로 돌아오자 그의 아들 하인리히 5세는 자신의 부친인 하인리히 4세를 지하 감옥에 가둔다. 천우신조로 탈옥한 하인리히 4세는 군병을 모으러 독일 전역을 다니지만 그를 따르는 백성이 없음을 보고 나이 50세가 되어서야 자신이 무능한 군주임을 깨닫는다.

1106년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맨발로 한 교회당에 들어가 지난날의 과오를 참회한 후 세상을 떠난다. 그는 여전히 파문 상태에 있었지만 교회는 그의 마지막을 지켜준다. 그는 자신의 아들 하인리히 5세에게 두 가지를 유서로 적어 보낸다. “나를 슈파이어 대성당에 묻어라. 그리고 나도 모든 것을 용서하니 너도 내 부하들을 용서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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