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운동과 메이지 유신은 지난 150년 전 동아시아의 양대 강국인 중국과 일본이 추구한 부국강병책의 두 모델이다. 20세기 동아시아 역사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직면해 망국의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열강으로 도약했기에 동아시아 각국은 매우 조급하게 역사의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하여야 했다.

당시 청나라는 건륭제의 전성기를 지나 늙어가는 제국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도 일본 열도를 통제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양무운동은 군사력 강화에 초점을 맞춘 부국강병이었다. 당시 청은 아편전쟁과 에로호 사건의 두 차례 전쟁에서 참패하면서 군사력 부분에서 서양에 미치지 못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저들은 자신들의 근본을 지키면서도 서양의 군사기술을 도입하자는 것이 이 정책의 기본골격이었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결국 1912년 청나라는 마지막 황제 부의를 끝으로 296년의 사직이 문을 닫는다. 저들은 신식무기로 무장했지만 이를 운영하는 조직은 낡고 부패하였다. 군 수뇌부는 부패한 구시대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그 출발점과 도착점이 청의 양무운동과는 달랐다. 미 폐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의 힘에 굴복하여 막부가 개항을 단행하자 격렬한 ‘존왕양이’운동이 일어난다. 당시 막부의 수장 정이대장군은 그 뜻이 오랑케를 정벌하는 존재였지만 결국 오랑케로부터 일본을 지켜내지 못하였기에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도쿠가와 막부는 무너지고 왕정복고를 통해 메이지유신이 단행된 것이었다. 저들은 도쿠가와 막부의 직할지 반환과 지방제후들이 보유했던 토지 반납 및 신민들에 대한 지배권을 반납하였다. 이를 ‘판적봉환’이라 불렀다. 저들은 곧바로 조세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새로운 국가체제를 수립했던 것이다. 양무운동과 메이지 유신은 목표는 같았지만 방법이 정반대였기에 메이지 유신이 성공했던 것이다. 양무운동은 군사력 강화를 통한 구체제 고수였지만 메이지 유신은 구체제의 개편이었던 것이다.

지금 이 나라는 국가 대혁신의 골든타임을 맞고 있다. 하지만 국가대혁신의 시간은 많지 않다. 인구고령화와 복지수용의 증대는 갈수록 빨라지면서 성장잠재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총회도 마찬가지이다. 뼈아픈 자기혁신, 체제의 변화 없이 추락한 하나님의 명예회복은 허울 좋은 메아리 일 뿐이다. 뿌리 깊은 부패, 준법정신의 부재로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총회가 되게 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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