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데이(Mayday)는 근로자의 날을 지칭하는 5월 1일이다. 이날이 근로자의 날로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1886년 5월 1일 ‘8시간 노동제’를 내걸은 총파업이 일어난다. 바로 미국에서였다. 당시 미국 노동총연맹의 결의로 시작된 파업은 5월 3일 메코믹 농기계 공장의 노동자들이 살해되면서 평화적 시위가 폭력시위로 바뀌어갔다. 이날 여섯 명의 노동자가 살해 된 이후 해이마켓 광장에는 여기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에게 폭탄을 투척하면서 분위기는 삽시간에 험악해져갔다. 이날 스파이스를 비롯한 여덟 명의 지도자가 경찰에 연행되었고 그 중 한 명은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 사건은 역사에 묻혀지는가 싶더니 그로부터 4년 후인 1890년 5월 1일 8시간 노동관철을 위한 국제적 시위로 나타난다. 바로 자유와 관용의 도시 파리에서였다. 이보다 1년 후인 1889년 7월 14일 파리에서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계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여 제2 인터내셔날을 결성했다. 결국 세계 노동자들의 국제적인 연대를 확인하는 근로자의 날인 메이데이는 이렇게 탄생했다.

동아시아 최초의 메이데이 행사는 1920년 5월 2일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다. 당시 도쿄 우에노 공원에서 모인 이 집회는 8시간 노동제와 최저임금제를 요구했다. 이 여파는 우리나라에도 파급된다. 1920년부터 동아일보 등을 통해 알려진 메이데이 소식은 1923년에 식민지 조선에서 노동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날의 행사는 일제 헌병경찰의 통제로 무산되었지만 경성의 YMCA회관에서는 기념 강연회로 대체되고 있었다. 일본인 유학생 백무 등에 의해 조선에 파급된 노동자운동은 1936년 5월 1일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기념강연회와 시위 등의 양상으로 메이데이는 계속 되고 있었다.

메이데이는 해방 후에도 중요한 행사로 자리 잡는다. 혼란했던 해방정국의 1946년과 1947년에도 조선노동조합 전국 평의회와 대한독립 촉성 노동총연맹이 주도한 메이데이 행사가 동시에 열리기도 하였다. 1957년과 1958년에는 메이데이 기념일이 대한독립촉성 노동총연맹의 결성일인 3월 10일로 변경되었다가 제3공화국인 1963년부터는 근로자의 날이라는 우리말로 정착되면서 1994년 이후 5월 1일로 자리매김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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