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원 목사(광주중흥교회)

주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내 곁에 머물러 계실 때 구원과 기도의 응답 치유가 있어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셨을 때 한 가나안 여인이 귀신에 들린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 분이 정말 우리가 믿는 주님 맞습니까? 주님이 정말 인종주의자이십니까? 왜 은혜를 구하는 이 불쌍한 여인에게 이렇게 모질게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이 사건 가운데 드러나 있는 표면적인 이야기 말고, 뭔가 주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특별한 메시지와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게 뭡니까?

본문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주님이 어디선가 나가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 14장 34절은 그곳이 게네사렛 땅인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거기에서 떠나시게 만든 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마 15:1).

예루살렘에서부터 갈릴리 게네사렛까지는 거의 150km 정도의 거리가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일부러 그 먼 길을 올라온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마 15:22)

사실 지금이 어떤 기회고, 어떤 시간입니까? 인류의 구주이신 예수님이 자기들 앞에 계십니다. 그분이 지금 천국 복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그런데 그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시간에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주목하지 않고, 대신 자기들의 관습 문제를 가지고 주님과 시비를 붙고 있습니다.

바로 그게 이유입니다. 주님은 믿음 없는 자들과는 함께 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떠나 이방인의 땅, 두로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십니다. 그 상황을 마가복음 7장 25~26절에서는 조금 더 자세히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수로보니게’라는 족속의 이름은 수리아라는 지명과 페니키아라는 지명이 합성되어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그 여인이 수리아 지방에 사는 페니키아 족속의 여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여인은 수로보니게 족속이 아닙니다. 본래는 헬라인, 즉 그리스인입니다. 그런데 그 헬라여자가 수로보니게 족속 남자에게 시집 와 수로보니게 족속으로 거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게 뭘 얘기하는 겁니까? 이 여자는 뼛속 깊이 철저한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그 땅이 어디 땅입니까? 이방인의 땅, 두로입니다. 불신의 땅이고, 하나님을 알지 않는 땅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다른 신을 섬기는 땅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이방 땅에 사는 이방 여인에게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아주 굉장한 믿음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22절)

그 여자는 자기가 사는 불신의 땅에 자기 동족들과 함께 머물러 있지 않고, 그 지경으로부터 나와 주님을 만나서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야, 즉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메시야를 기다린다는 유대인들은 일부러 150km가 넘는 먼 길을 찾아와 손 씻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시비 걸고 있는데, 철저히 이방인인, 그것도 두로 지방에 살던 그 여인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며 주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주님 앞에 합당한 태도입니까? 비록 이방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기 의나 공로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주님께 불쌍히 여겨주심을 구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이 이방여인이 아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자신의 공로와 자격을 내세우면, 자기 잘난 것을 내세우면 절대로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긍휼하심을 붙잡고 매달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뜨거워지십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나, 간질병에 걸렸던 아이의 아버지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간청으로 주님의 허락하심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완전히 다른 주님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본문 24절에는 주님의 답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처음에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다가, 여인이 계속 쫓아오며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무슨 뜻입니까? 주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지 개와 같은 이방인들을 위해서는 오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듣는 입장에서, 아무리 주님이시라도 참을 수 있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또 다시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

주님 앞에서 자신의 자격 없음, 비천함, 무익함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주님, 맞습니다. 저는 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감히 자녀들에게나 줄 온전한 한 끼의 식사를 얻겠다는 것 아닙니다. 하지만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고 살지 않습니까?” 드디어 예수님의 입에서 허락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28절)

많은 분들이 오늘 말씀을 해석하면서,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예수님께서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믿음을 시험해서 비로소 아시는 분이 아닙니다. 시험해보지 않아도 우리 마음에 뭐가 있으며, 우리 믿음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다 아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 여인의 믿음을 아셨을 뿐 아니라, 두로 지방에 이 여인이 있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 여인을 만나 그 믿음을 온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의 불신을 꾸짖으시려 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런 믿음은 누구에게 있어야 합니까? 당연히 이스라엘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가운데는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자기 하인을 위해 주님께 나아왔던 백부장의 얘기도 그러합니다. “이스라엘 가운데도 없는 믿음”, 그게 말이 됩니까? 왜 이스라엘에는 그런 믿음이 없고, 이방인들에게 그런 믿음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우리의 직분과 신앙 경력에 부응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목회하면서 자주 놀라게 되는 것이 이런 경우입니다. 사실 그런 믿음은 우리 장로님들이나 권사님들 같은 교회 중직들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인데, 오히려 이런 분들에게서는 그 같은 믿음이 잘 나타나지 않고, 무슨 믿음이 있겠는가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느닷없는 대단한 믿음의 반응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만큼의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믿음 없는 사람들하고는 함께 하실 수 없어 ‘거기서 나가’ 두로 지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주님이 떠나시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은혜도 끝이고, 기도응답도 끝이고, 구원도 끝입니다. 주님이 머물러 계셔야 거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이 머물러 계셔야 거기에 구원이 있고, 기도의 응답이 있고, 삶의 회복이 있고, 치유가 있습니다.

주님이 내 곁에 머물러 계셔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가정에 머물러 계셔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교회에 머물러 계셔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 머물러 계셔야 합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주님은 믿음의 사람과만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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