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강 목사(중심교회)

‘이신칭의’ 선명한 말씀 선포될 때 ‘오직 은혜’의 복음이 선다
교리 포기 유인하는 간계에 맞서 ‘교리와 신학이 있는 사경회’로 회귀해야


 
▲ 서문 강 목사(중심교회)
2000여 년의 교회사는 성경이 말하는 ‘복음 이해, 또는 해석’을 둘러싼 치열한 영적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 복음의 영광을 그 효력의 차원에서 감격하며 정의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런데 문제는 ‘사도가 말하는 복음이 무엇이고, 또 그 복음이 어떻게 믿는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또 그 구원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얻는 것은 사활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교회사는 이 문제를 중심에 두고 치열한 쟁론이 모든 시대에 걸쳐 계속 진행되어 왔음을 증거한다.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차별의 중심에 그 문제가 있다.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에도 그 문제에 대한 여러 이견(異見)들로 분열되어 있다.

그러면 앞에서 신학적 작업을 거쳐 앞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포괄적인 답이 될 만하게 정돈된 교리는 없을까? ‘이신칭의’(오직 사람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의 교리이다. 성령께서 16세기 루터를 필두로 칼빈 등 개혁자들에게 성경, 특히 로마서에 극명하게 드러난 그 교리를 이해할 신령한 총명의 빛을 부어주셨다. 그로 인하여 종교개혁이 시발한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종교개혁의 중심 가치가 이 ‘이신칭의 교리’와 바로 연결된다. 이 교리의 진정성과 역동성이 중세 이후 1000여 년 간 비성경적인 교리로 무장하여 군림하던 로마 가톨릭의 무소불위의 권위의 굴레를 부수어 내었다. 실로 그 교리는 성경의 대중추이다. 참된 신앙과 신학의 행로는, ‘거듭남으로 신령한 눈이 열려 그 교리가 함축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항상 감사하며 그 교리가 요구하는 정당한 반응이라’ 해서 누가 탓하겠는가?

이 교리의 핵심적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동적인 행사’이다. 우리 구원이 율법의 행위, 또는 도덕적 수련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완전한 의와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완성된 구속(救贖)의 완전하고 충분한 효력을 믿음으로 말미암게 하시는 은혜의 방식이 그 중심이다.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택한 백성의 구원은 ‘죄와 죄의 모든 결과에서 사람을 해방하고 죄와는 상관없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행사의 동력이 ‘오직 은혜’다. 우리가 그 은혜를 받는 통로로서의 ‘믿음’도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방편’이다. 방편으로서의 ‘믿음’마저도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발생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이같이 ‘이신칭의’의 교리는 실로 ‘성삼위의 경륜적 행사로 인한 우리 구원의 영원한 완전성’을 포괄한다. 하늘 법정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떠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서 있는 죄인에게 즉시 그리스도의 의와 구속의 효력을 전가하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네가 의롭다’고 판결하시는 성부의 선언이 이 교리다! 그러니 이 교리가 복음의 심장이다. 이 방식이 아니고는 복음이 복음일 수 없다.

실로 하늘 법정에서 ‘믿는 자를 의롭다’하시는 성부의 선고는 거대하고 영화롭고 복되다. 그 판결의 실효적 내용은, “네가 내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이루었도다” 함이다. 마치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이 오직 의만 이룬 것 같이’ 여겨 주심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죄 밖에 없는 자를 ‘완전한 의인처럼 여겨’ 의롭다 선포하시는 성부의 이 판결은 ‘완성적’이다. 그래서 ‘단회적’이고, 어떤 경우에도 번복되지 않아 ‘그 효력이 영원하다.’ 심지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그 이후 짓는 죄도 ‘하나님의 법정에서 정죄의 대상’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신자의 죄는 더 이상 하나님의 법정적 정죄와 형벌의 대상이 아니다. 오직 신자의 죄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징계와 연단으로 다루어진다(히 12:4~13). 곧 신자의 죄는 ‘칭의’ 문제에 걸리는 것이 아니고 ‘성화(聖化)’의 주요 대상이다. ‘이신칭의’는 믿는 자의 영원한 구원과 그 안전성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의 중심’에 ‘이신칭의’의 교리를 아는 ‘감격과 감사’를 솟구쳐내는 샘이 있다.

그래서 교회사적으로 볼 때 가장 찬란한 영적인 시대, 사도시대를 비롯하여 16세기의 종교개혁 시대와 그 후로 17세기 중반까지 이어지는 청교도 시대, 18세기의 구미의 영적 대각성 시대, 19세기와 20세기의 영적 부흥 시대에 쓰임 받은 위대한 설교자들의 설교마다에 이 교리가 중심에 있다. 1907년 평양 대부흥기의 설교들도 매 한 가지이다. 그 점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낳으시고 먹이시고 기르실 때 이 교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셨음을 실증한다. 이와 관련하여 존 칼빈,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 스펄전, 로이드 존스 등의 설교들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그러니 사탄이 ‘이신칭의’ 교리를 포기하도록 성도들을 유인하려는 간교한 수작을 부릴 것은 뻔하다. 이것이 교회사 내내 이어져 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 교리와 관련하여 현대와 더불어 교회사에 나타난 사탄의 간계들의 실례들을 간추려 본다. (1) 이 ‘이신칭의’ 교리를 버리고 교묘하게 ‘행함’을 가미하는 ‘율법주의’를 그 자리에 앉힌다(갈라디아서의 저작 동기와 배경), (2) 그 교리를 오해 하거나 오용하여 육체의 기회와 방탕의 구실로 삼아 도덕폐기론(Antinomianism, 또는 무율법주의)으로 빠지게 한다(유다서 4절에서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에 대한 경고가 바로 그 이단을 겨냥한다.) (3) 오늘날에는 샌더스나 톰 라이트 등으로 대표되는 ‘새 관점’이 ‘유대주의적인 시각에서 바울의 칭의론을 새롭게 해석하려 한다.’ 그 저변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만민의 차별성을 철폐한 ‘이신칭의’ 교리의 보편적 효력을 감추려는 간계가 보인다(갈 3:28). (4) ‘칭의와 성화의 구분을 없이하려는’ 시도이다. ‘둘을 한 통으로 보아야 한다.’는 구실 아래 ‘이신칭의’의 교리를 흐트러뜨린다. (5) 이와 같은 노선에서 성화를 강조한 나머지 ‘이중적 칭의론(믿음의 시초와 최후의 심판에서의 칭의론)’과 ‘유보적 칭의론(열매 맺기까지 칭의가 유보된다는 주장)’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이런 관점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해야 한다’는 구실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를 강조함을 누가 탓하랴. 그러나 그 때문에 ‘칭의 교리의 근본’에 손을 대면 ‘천사도 저주 받을 다른 복음’이 된다(갈 1:6~9). 그러면 예수님 옆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의 구원을 어떻게 설명하려는가? “예수여 당신 나라에 임하시거든 나를 생각하소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2,43)

이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가짐이 참 중요하다.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심과 가르치심 속에서 ‘칭의’의 영광을 바르게 인식하면 필연 영적으로 산 사람으로서 이전 죄가 왕노릇하던 삶을 청산하고 전인적 ‘성화’의 길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칭의와 성화’는 떨어져 분리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 연관을 가진 ‘구원의 한 몸’임에 분명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칭의’와 ‘성화’의 유기적 연관은 견지하면서도 논리적으로 엄격하게 구분함이 절대 필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러면 ‘믿음+행위=구원’이라는 로마 가톨릭의 구원관으로 떨어진다. ‘칭의론의 교본’이라 할 수 있는 ‘로마서’를, ‘믿는 자의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의 조명으로 해석하면 큰 혼란이 일어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의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강조하는 로마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전성과 충분성’에 치중한다. 반면 야고보서는 그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믿는 사람의 정당한 반응, 곧 ‘성화의 열매’를 맺을 필연성을 강조한다. 야고보서의 문맥을 잘 살피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조건으로 ‘행함’을 강조한 적이 없다. 도리어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들에게 ‘너희 믿음의 정당성을 보이는 표지로서의 마땅한 성화의 열매인 행함을 보이라’고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행함의 정당성’을 진술하는 야고보서 2장의 논리적 근거가 무엇인가 보라.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약 2:1)

그와 같이 ‘성화의 열매’도 ‘칭의’를 거친 사람 속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의를 기근거한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성령님의 역사)’일 뿐 그 사람 자신의 공력의 소산이 아니다(빌 2:12,13;고전 15:10). ‘성화’는 오직 ‘칭의’의 은혜와 영광을 누리게 된 자의 이후의 행로이다. 그리고 ‘성화의 열매’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 자체로는 ‘완전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공의의 판단 앞에서’는 여전히 턱 없이 모자라다. ‘율법의 행위’로 법정적 칭의를 얻으려면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갈 3:10). 그런 판결을 스스로 받기에 충분한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격에 열리는 ‘성화의 열매’를 ‘칭의의 조건’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의’에 다른 것을 더하려는 ‘다른 복음’이 되어 갈라디아서의 탄핵을 받는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1,2)

다시 강조하건대, 어떤 주제의 설교 속에서도 항상 반복적으로 ‘이신칭의’ 교리가 선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 ‘행위 공로’ 사상을 배격하고 ‘오직 은혜’의 복음이 선다. 모든 설교에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어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충분한 구속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고 자녀로 대우하시며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거듭 선포되어야 한다(롬 8:30). ‘칭의가 제공하는 동기(動機)와 영화(榮化)의 비전’으로 ‘계명 지키기’가 바로 성화의 실질이다(요 15:9~15).

오늘날 한국 교회의 이단들의 발호는 복음의 핵심인 ‘이신칭의’ 교리의 능력과 그 영광을 외면한 강단 메시지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중보의 완전성과 충분성과 충족성과 유일성이 빠진 모든 설교는 ‘다른 중보자’를 불러 들이는 다원주의적 설교다. 교회들 출입문에 이단들의 출입을 금하며 법적 조치 운운하는 스티커를 붙인 일을 나무랄 것은 아니나, 그보다 ‘이신칭의’의 교리의 은혜와 능력과 영광을 반추하게 하는 말씀이 이단 퇴치의 특효약이다.

교회들이 이제 단순한 ‘심령 부흥회’가 아닌 ‘교리와 신학이 있는 사경회’로 회귀해야 한다고 필자는 감히 제안한다. 낙담하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돌이키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방식이 ‘교회 부흥 사경회’의 모델이 아닌가?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27,32)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