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복 목사(남현교회)

믿음 본질은 주님 위한 고난에 있습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에게는 천국이 저희 것이며 큰 상이 기다리고 있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팔복 중에 마지막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의 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앞서 선포하신 7가지 복 모두가 역설적이지만 그 중에서 여덟 번째 복은 우리에게 가장 큰 도전을 줍니다. 우리의 상식을 벗어난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상식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대접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일하다가 성공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일하다가 소원 성취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런데 주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선포하십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눠보겠습니다.
 
의를 위해 받는 박해의 내용은 무엇일까요?(10~11)

박해의 내용을 11절에서 세 가지로 정의 내립니다. 하나는, 예수님 때문에 욕을 먹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 때문에 악한 말 듣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로 인해 환영받고 대접받는 것을 축복으로 압니다. 예수로 인해 건강하고 돈 버는 것을 축복으로 압니다. 합격하고 승진하는 것을 축복받은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예수 때문에 희생하고 천대 받는 것은 싫어합니다. 손해 보고 억울한 일 당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런 일 당하면 불평하고 짜증을 부립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무엇이 진짜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믿음의 본질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현세주의와 이기주의, 물량주의가 교회에까지 깊숙이 침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본질을 변형시켜 버렸습니다. 물론 예수 믿으면 세상적인 축복도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이 믿음의 본질은 아닙니다. 믿음의 본질은 영적인 것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교구목사님이 성도님 집에 심방을 갑니다. 그런데 문전박대 당하고 면박을 당합니다. 그 목사님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전혀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어쩌면 목사가 된 것에 대해 회의가 올지도 모릅니다. 다음부터 그 집에 가보기도 싫어질 것입니다. 다른 집에 심방을 갑니다. 너무 반갑게 맞이하고 대접까지 잘 받습니다. 목사님은 심방하면서 하루 종일 힘이 펄펄 납니다.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힘 있게 사명을 감당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그 목사님에게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한 번 본문을 읽어 보면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10~11)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박해를 당하고 애매한 욕을 먹을 때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12절에서 두 가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존경했던 신앙의 선조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성공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니 오늘날 가지고 있는 믿음의 가치로는 예수 믿고 축복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망한 사람들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적으로 평가할 때 성공한 분이실까요? 실패한 분이실까요? 세상적으로 볼 때는 분명히 실패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재산이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요즘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이 많은 부동산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어디 그 뿐일까요? 예수님은 장수하지도 못하셨습니다. 나이 33살에 죽었으니까, 너무 일찍 죽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결혼도 못하고 자녀도 없이 죽었습니다. 죽어도 그냥 병사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요즘 세상적인 가치로서는 완전 실패하신 분이십니다.

그럼 사도 바울은 어떨까요? 바울도 예수 믿고 주의 일하다 쫄딱 망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의를 위해 자기의 재산도 지식도 버립니다. 젊음도, 명예도, 권세도 다 버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 일생 동안 헌신한 사람입니다. 그는 결혼도 못했고 자녀도 없습니다. 그리고 비참한 최후를 마칩니다. 세상적 가치로서는 예수 믿다가 완전히 실패한 사람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어떨까요? 그분은 믿음 지키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감옥에 가서 갖은 고문을 다 받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믿음을 지킵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되었나요? 그가 풀려나 재산을 모으고 건강을 회복했을까요? 해피 엔드로 끝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비참한 상태로 순교합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주님 위해 헌신했는데 하나도 보상 받지 못하고 죽습니다. 12제자 역시 모두가 비참하게 최후를 마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바울과 제자들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성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믿음을 말하면 언제나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의 삶의 모습을 본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추구하는 것은 정반대의 것들입니다. 어떤 것이 성공이고 어떤 것이 실패인지 착각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믿음의 부스러기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무엇을 보시고 판단하실까요? “너는 세상에 얼마나 많은 것 남겨 놓고 왔느냐? 얼마나 많이 모았느냐? 얼마나 크게 지었느냐? 무슨 직분을 가지고 있었느냐?” 결코 이런 것을 보시지 않습니다. “너는 예수님을 위해 얼마나 희생을 했느냐? 너는 예수님을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해 봤느냐? 너는 예수님을 위해 얼마나 박해를 받아 봤느냐?” 이것을 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게 고난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는 어떤 축복을 받게 될까요?

첫째,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10)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의 복은 세상적인 복이 아닙니다. 천국의 복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천국의 복보다는 현찰을 원합니다. “주여! 천국도 좋지만 우선 잘 먹고 잘 살아야 되겠나이다. 주여! 천국도 좋지만 좋은 아파트 하나는 있어야 하겠나이다. 주여! 천국도 좋지만 우선 교회는 건축해야 하겠나이다” 이것이 오늘날 믿음의 형태입니다.

그러나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알면 이 세상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오물과 같이 버렸노라” 고백합니다. 천국의 영광은 이 세상의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천국에서 큰 상을 받는다고 약속하십니다.(11~12)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은 천국에서 상이 크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믿음의 힘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똑같은 구원이 아닙니다. 분명 영광스러운 구원이 있는가하면, 부끄러운 구원이 있습니다. 큰 상 받는 구원이 있는가하면 작은 상 받는 구원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전혀 상을 받지 못하는 부끄러운 구원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나라에 가면 세 가지 때문에 너무나 놀랄 것입니다.

상상을 초월한 그 영광 때문에 놀라 기절할 정도일 것입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당하고 희생한 성도들이 얼마나 큰 상을 받는지 놀랄 것입니다. 상을 못 받는 성도들의 비참함과 부끄러움 때문에 놀랄 것입니다.
 
결론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예수 믿으면서 한 번도 박해를 받아보지 못하신 분들 많습니다. 전도하다가 한 번도 욕을 먹어 보지 못하신 분들 많습니다. 문전박대 당해본 분들도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복 받을 일을 전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 믿으면 물질의 축복도, 건강의 복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믿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믿음의 본질에서 얻어지는 부스러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나를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주신 주님을 위한 고난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상은 이 땅의 보상이 아닌 하나님나라의 보상입니다. 주님 위해 고난에 참여하는 자 천국이 저희 것이며, 천국에서 큰 상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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