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역사신학)

올바르고 순전하게 활동했다
 

“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하나?”라는 질문은 20세였던 나에게 큰 도전이었다. 당시 많은 기독교 양서들을 통해 답을 찾고자 노력했다. 마침내 찾은 답변은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였다. 정말 명쾌한 답이었으나, 어린 나에게는 여전히 추상적이었다. 긴 세월과 경험을 통해 이 답변이 진정한 진리임을 깨닫게 되었다. 만일 젊은이들이 기독교인이 되어야 하는 필연성에 대해 나에게 묻는다면 동일하게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인간인 나는 누구냐는 철학적 질문을 물어볼 수 있다. 그 답변은 궁색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자신을 안다는 것은 주관적이고 일시적이고 부분적이다. 하지만 칼빈이 말한 바처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우선 되어야 자신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진리에 대한 명확한 실마리가 아닐 수 없다. 그분을 알기 전에는 자신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에 대한 지식의 전제이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성경적 답변은 무엇일까?

성경은 인간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지상과 하늘의 모습으로 이해시킨다. 첫째로, 지상의 모습은 타락 전과 타락 후, 그리고 중생된 인간의 상태이다. 둘째로, 하늘의 모습은 영화된 상태로서 사망 후 하늘나라에서 구원받은 자만이 누리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영벌 가운데 있을 것이다.

인간 이해를 위해 순차적으로 타락 전과 타락 후, 그리고 중생된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개혁신앙의 교리도 이 순서를 따른다. 타락 전의 상태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1권 15장, <벨지카 신앙고백서> 14항,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10문과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17문에서 설명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10문의 “하나님은 어떻게 인간을 창조하셨나?”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답변한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17문에서도 동일한 질문과 답변을 하지만, “타락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고 덧붙인다. 이 상태를 설명이라도 하듯이 <벨지카 신앙고백서> 14항에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영예로운 상태에 있었을 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시 49:20) 탁월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죄를 범할 수 있었던 아담의 상태가 바로 타락 전 인간의 상태였다. 아담 자신은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도록 버려두었기에 죽음과 죄에 종속하게 되었고(창 3:16~19; 롬 5:12)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창 2:17; 엡 2:1, 4:18)”고 고백한다.

타락 전의 상태를 칼빈은 “인간의 처음 창조 시 모든 후손과 달랐고…영의 모든 부분은 청렴함을 갖고 있었다. 선을 선택하는 의지의 자유와 마음의 순전성이 있었다”고 말한다(1권 15장 8항). 결국 인간이 타락하게 된 것은 아담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돌드레히트 신조> 3~4장 1항에서 이렇게 천명한다. “그의 의지와 심정은 정직했고 그의 모든 애정 역시 순결했기에 인간은 완전 거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정직, 청렴, 순결 또는 올바른 상태로 창조되었고, 이것을 의와 거룩 및 진실함으로 창조되었다고도 표현한다.

타락 전의 상태에 관해 다시 말해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의, 진리 및 거룩으로 창조되었지만 죄를 범할 가능성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칼빈의 설명처럼 타락 전의 상태는 영의 모든 부분이 청렴함, 즉 올바름의 상태였다. 타락 후의 상태처럼 이기적이고, 음흉하고, 기만적이지 않는 겉과 속이 일치하는 아름다운 상태였다.

변할 수 있었으니 불완전한 상태로 또는 미완성의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타락 전의 상태를 순전하고 청렴한 인간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이해해야지 기계처럼 융통성도 없고 자유도 없는 움직이는 물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벌거벗음을 보고도 음욕이 불타지 않았고, 사탄이 들어간 뱀을 보고도 편견을 갖지 않을 수 있는 상태였다. 창세기 주석에서 칼빈은 “부패하지 않은 성품에서는 영예로운 것 외에 어떤 것도 없었다. 우리 안에 부끄러운 것이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오류에 오염된 것이고, 최초의 우리 부모가 죄로 더럽혀지기 전까지 그런 상태였다”고 말한다.

타락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순전했다? 이 의미는 영의 기능 중 한 부분인 의지의 자유가 있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모든 선택이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포함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자유를 주신 것이다. 인간은 순전한 상태에서 자신의 의지를 자유롭게 따를 수 있었다. 이러한 순전한 상태를 우리는 느끼지 못한다. 현재 우리는 타락 후의 상태에 있고, 영의 기능들이 제각기 활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락 전의 상태는 영의 기능들이 올바르고 순전하게 활동한 상태였다. 이것을 불완전하다거나 부족한 상태라고 언어적 기교를 부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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