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준 목사(열린교회, 총신대 교수)

설교는 영적 전투,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갈망하라
위대한 개혁은 언제나 설교자들이 주도 … 복음의 감동 이끄는 설교 갱신 필요

 

▲ 김남준 목사(열린교회·총신대 교수)

몇 해 전 안과 수술을 받았다. 입원을 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병원에서 주일을 지켜야 했다. 병원에서 외출증을 받아 근처 교회들에서 주일 오전예배와 오후예배를 드렸다. 오전예배는 어느 장로교회에서, 오후예배는 어느 침례교회에서 드렸다. 오전예배 설교의 주제는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였다. 설교 시간 내내 말도 되지 않는 논리에 신학적 반감을 느끼며 견뎌야 했다. 더욱이 성경은 단지 설교 주제를 알리기 위해 잠깐 봉독된 후 설교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오후예배에서는 좋은 설교를 기대하였으나 오히려 오전설교가 더 나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전예배 설교는 비성경적이었지만 주제라도 뚜렷했기 때문이다. 오후예배 설교에서는 설교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오래전 토마스 칼라일(T. Carlyle)이 역사에 미치는 설교의 영향력을 강조하면서 “세계의 운명이 설교가 행해지는 강단에 달려 있다”고 말한 것과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가?
 
설교의 위기를 본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년 전, 구(舊)프린스턴의 교수였던 제임스 알렉산더(J. W. Alexander)의 지적은 여전히 우리에게 뼈아프게 다가온다. “오늘날 젊은 설교자들은 설교에 임할 때 큰 전투를 앞둔 자의 각오로 임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장 강력한 열정의 원천을 찾아 인간 감정의 대양 깊은 곳까지 충격을 주어야 하는 사람으로서 설교를 준비하지 않는다.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개혁자들은 모두 위대한 설교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설교라는 은혜의 방편을 세우신 것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단은 세상 역사의 뱃머리이다. 그러나 “설교의 강단이 세상을 인도한다”라는 진술에 대해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더 이상 공감하지 않는다.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구미(歐美)의 신학교에서도 설교학은 인기를 잃어가고 있는 과목이다. 그러나 잉그베 브릴리오드(Y. Brillioth)의 지적과 같이, 교회역사의 위대한 개혁은 언제나 설교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왈도파, 프란시스파, 도미니크파, 롤라드파, 보헤미아의 형제단, 스코틀랜드 장로교파, 메서디스트들의 역사가 이러한 사실을 증거한다.

오늘날 조국교회에서 설교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된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로 교회적 상황이다. 오늘날 설교의 퇴조는 복음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이 흐려지고 있는 영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목회자들이 복음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체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설교하고, 교인들도 더 이상 복음 진리를 아는 지식의 성장에 대해 목말라하지 않는다.

둘째로 사회적 상황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전통적 행동양식과 새로운 사고를 따르는 행동양식 사이에 갈등을 불러왔다. 특히 매스미디어의 폭발적인 발전은 텔레비전, 인터넷, 영화, 스마트폰 등에 감각적으로 익숙해져서 설교와 같은 전통적 의사 전달 수단에 의지하지 않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현대인들의 사유 능력까지 현저히 저하시켰다.

셋째로 사상적 상황이다. 사회에 팽배한 반권위적 문화는 설교를 일종의 정신적 지배 내지는 군림의 상징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하나님·성경·교회 등 기독교의 진리의 절대성을 거부하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설교의 영광 회복이다. 앞서 언급한 사회적 변화와 시대적 조류를 타고 설교는 이제 하찮게 취급되고 있다. 오늘날 ‘설교’라는 말은 “시대에 뒤떨어진 나이든 사람이 아랫사람들에게 지루하게 늘어놓는 감동 없는 잔소리” 정도로 이해된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러한 위기의 시대를 말씀의 권위보다는 공감을, 진리보다는 재미를, 신령한 것들보다는 세속적인 것들을 추구함으로써 돌파해 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으려는 세속적 목표도 극히 일부분의 설교자들만이 성취한다.

현실 적응의 접근이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신학적인 진지한 고민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은 생존을 모색하고 부흥주의(Revivalism)를 도모함으로써가 아니다. 교회의 존재 가치는 성도들과 세상에 진리를 선포하고 존재의 울림을 들려줌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 지식이 세상을 덮게 하는 것이다(합 2:14). 이 일을 위해 필요한 것이 설교의 갱신이다.
 
설교 내용의 갱신 : 복음과 신학

설교는 설교 내용(sermon)과 설교 행위(preaching)으로 나뉜다. 그러므로 설교의 갱신은 곧 설교 내용의 갱신이자 설교 행위의 갱신이다.

설교 내용의 갱신은 설교를 복음과 신학으로 채우는 일을 의미한다. 조국교회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설교단에서 아무 얘기나 전달되는 풍조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설교는 정신훈화가 아니며, 의문(儀文)에 매인 율법의 강설도 아니다. 설교는 성경에 대한 해석적 활동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후, 즉시 화산이 폭발하듯 강렬하게 나타난 현상은 성경을 해석하는 설교자들의 출현이었다(행 4:1, 6:10, 9:20).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이나 새로운 사실들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었던 구약성경의 본문을 해석하여 복음의 신학적 의미를 보여주었다(행 2:14). 토마스 카트라이트(T. Cartwright)가 말한 바와 하나님의 말씀은 있는 그대로 읽을 때보다 해석될 때에 더욱 청중들의 가슴에 커다란 불꽃을 일으킨다. 따라서 복음을 설교한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과 복음을 해석한 교리, 곧 복음에 의해 구축된 사상을 선포하는 것이다(행 28:22).

우리에게는 복음에 감격하는 설교자들을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가? 오늘날 조국교회에 십자가, 그리스도의 고난, 대속의 교리, 육체의 부활, 종말과 심판, 회개와 믿음, 치열한 기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함, 신앙의 정절과 순교의 각오와 같은 복음 교리들이 설교되고 있는가?

피 묻은 십자가 대신 인생의 성공 사례와 생활의 태도 등을 다룸으로써 감동과 평온을 주고자 하는 것은 ‘아침마당’이나 ‘오프라윈프리 쇼’ 제작진들의 방송 목표이지 목회자의 설교 목표는 아니다.

오늘날 설교의 표절 문제는 목회자들이 설교집의 용도를 오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한 사람의 설교집은 다른 목회자가 설교할 때 보고 하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 참된 설교집은 그것을 읽는 사람을 성경으로 데려간다. 즉,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들고 설교단으로 뛰어 올라가고 싶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싶게 만드는 것이 좋은 설교집이다.

성실한 독서와 치열한 연구로 우리의 설교를 올바른 성경 해석과 깊이 있는 신학으로 채우는 일은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풍성한 꼴을 먹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설교 행위의 갱신 : 성령과 능력

이어서 필요한 것이 설교 행위의 갱신이다. 이것은 진리를 전하는 설교자에게 임하는 성령의 능력 회복을 의미한다. 설교자의 갱신은 그가 설교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반드시 성령의 기름부음이 필요하다. 일평생 기도의 사람으로 살았던 에드워드 바운즈(E. M. Bounds)는 이렇게 말했다. “기름부음 받은 설교자에게는 신비한 힘이 있다. 말씀의 문자 하나하나가 성령의 검증을 받았기 때문에 강력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양심을 억누르고 휘저으며 가슴을 찢어 놓는다. 반대로 기름부음이 없는 설교는 모든 것이 딱딱하고 건조하고 생명을 죽인다.”

올바르고 깊이 있는 성경해석도 중요하지만 설교를 진정으로 설교되게 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 부으심이다. 성령의 능력은 방법이 아니라 사람에게 부어지기에, 설교의 능력은 곧 설교자와 직결된다. 설교자가 성령에 능력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그의 설교에서도 성령의 능력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의 다음 언급은, 이에 대해 좋은 예증이 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것이 설교 내용의 갱신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다음 고백은 설교 행위의 갱신을 보여준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바울은 지혜를 권하는 말로써 사람들의 동의만을 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선포된 내용이 청중의 마음속에 역사하기를 원했다. 찰스 스펄젼(C. H. Spurgeon)의 지적과 같이, “선지자들에게 함께 하였던 하나님의 영의 능력이 설교자에게 머물지 않는다면 검은 설교복은 속이는 옷에 지나지 않는다.”

설교를 영적인 싸움이 수반된 긴박하고도 치열한 영의 일로 생각하지 않는 설교자는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이 능력을 부어주셔야 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설교는 본질적으로 영적 전투이다. 신학적으로 매우 부주의했던 인물인 찰스 피니(C. Finney) 역시 설교에 대해서만큼은 올바른 진술을 남겼다. “설교란 악한 영에게 사로잡힌 영혼들에게 나아가 그를 사로잡고 있는 세력들을 쳐부숴 영혼들을 탈취해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드리는 것이다.”
 
설교자는 구름이다

기독교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종교이다. 겉으로 드러난 인간의 단점이나 사회 속의 모순과 부조화를 하나하나 고치는 일도 중요하나, 기독교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인간 심령의 깊은 곳을 개조함으로써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는 이 일을 위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 일을 위해 설교자는 힘을 다해 설교의 내용들을 준비하여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경과 학문에 대한 성실한 탐구로 준비된 설교가 기도의 눈물로 적셔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기름 부어져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는 “설교자들은 증거의 구름들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설교하지만 단지 구름일 뿐이다. 그 구름이 비가 되어 메마른 땅을 두루 적시고, 그 속에서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 울려 퍼지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다시 한 번, 조국교회에 설교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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