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주일 설교를 위한 제언/ 죽은 자의 다시 사는 것이 없다면

‘고난을 기뻐했던’ 사도들 역시 연약했던 인간, 부활 믿음이 영원히 사는 삶으로 변화시켜

1. 시작하는 글

한천설 교수
(총신대 부총장·신대원장)

올해도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된다. 매 주일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라면, 이 부활주일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부활주일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 신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며, 성도들이 이 부활신앙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소망과는 달리 부활주일은 대부분의 신자들에게는 별 의미 없이 지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비록 올해도 부활절의 상징인 형형색색의 달걀들, 부활절 칸타타, 부활절 연합예배, 그리고 특별헌금도 있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왜 성도들은 설교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부활신앙의 중요성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 글의 목적은 부활신앙을 피상적으로만 인식하고 현세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현실을 분석하고,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이란 어떤 삶인지를 살펴봄으로 부활절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데 있다.
 
2. 부활주일 설교를 위한 현 한국교회의 상황분석

언제부터인가 우리 한국교회에는 부활을 지식적으로는 인정하고, 또 믿는다고 고백하기도 하지만, 그 부활신앙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삶으로는 분명히 나타내지 못하는 성도들이 많아지고 있다. 어떤 분은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겸손히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보자. 오늘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하늘 백성이라는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본향을 향해 가는 순례자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래서 미래지향적인 가치관과 그 날을 중심한 행복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죽음조차 두려워 않는 ‘부활신앙’을 소유하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을 할 수 있는 목회자는 얼마나 될까?

우리 목회자의 사명이 공동체의 문제를 바로 직시하고 그것을 말씀으로 치유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예배시간마다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은 하지만 그 고백에 합당한 삶이 없는 것! 부활을 믿지만, 부활을 중심한 미래중심적 인생관보다는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현세주의자들로 넘쳐나는 것! 이것이 솔직한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된다.

3. 부활신앙 상실의 원인

왜 이런 안타까운 현상이 초래되고 있는가? 이 책임이 과연 성도들에게만 있을까? 혹시 우리 설교자들이 부활절 메시지를 바로 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혹시 설교자들이 부활의 중요성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가 결여된 결과, 매년 비슷한 판에 박힌 설교, 예견된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은 아닐까?

몇몇 설교자들은 절기설교만큼 쉬운 것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절기설교만큼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도 없을 것이다. 부활주일 설교도 예외는 아니다. 다른 절기설교 때와 마찬가지로 부활주일이 되면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올해는 어떤 설교를 해야 할 것인가” 하고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부활절 설교는 대개 두 가지 주제, 즉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성’이나 혹은 ‘부활한 몸의 성질’에 치중되어 있었다. 이런 경향은 학자들의 논문도 마찬가지이다. 아마 올 2016년 부활절 설교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설교를 듣는 성도들 역시 우리 목사님의 이번 부활절 메시지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예상할 것이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부활 신앙이 초대교회에 미쳤던 결정적인 영향을 생각하면 조금은 강조점이 빗나가 있는 설교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사도 바울도 ‘부활의 역사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성을 강조할 때는, ‘부활사건’의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납득시켜서 그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선포는 단순 명료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부활시키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36 참조). 다시 말하면, 부활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초월적인 역사이기에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가운데 실제로 일어났고, 또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처럼 다시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종말주의자처럼 내세만을 바라며 이 세상에서 도피와 회피의 삶을 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성도들에게는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영역주권으로 변화시키고 확장시켜 가야할 책임과 사명이 있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능력있는 삶의 근거가 부활신앙인 것이다. 바로 이것을 우리 설교자들이 힘있게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제자들의 부활신앙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은 어떤 면에서 보면 제자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가는 사람들이었다. 자리다툼이나 하고(마 18:1),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는 어찌할 바를 몰라 절망에 빠졌던 무리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 이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절망에 빠졌던 이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참 메시아이며(행 2:36), 생명의 주시며(행 3:15), 십자가에 못박힌 이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와 용서를 주신다.”고 담대히 설교했다(행 3:21).

제자들을 이렇게 완전히 변화시킨 그 원인은 무엇이었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신약의 대답은 오직 한 가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부활은 초대 기독교의 중심메시지였다. 최초로 기록된 기독교의 설교는 부활을 선포하는 것이었고(행 2:14-36), 사도들의 설교도 베드로의 설교를 시작으로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중심 메시지였다(3:14,15). 이처럼 사도들이 변화하고, 능한 일을 할 수 있고(4:10),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부활신앙은 이들을 완전히 변화시켰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게 만들었다. 이들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변화의 원동력은 바로 부활신앙, 즉 하나님께서 나도 예수님처럼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신앙이었던 것이다.
 
5. 바울의 부활신앙

이러한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중요한 사건이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 바울의 생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달라졌다(행 9:1-18). 그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이 완전히 변화되었고, 과거에 귀중히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을 정도로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의 생애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그의 설교와 신학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바울의 모든 신학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관점에서 정립되어야 할 만큼 부활은 그의 신학의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 H. Ridderbos는,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속사의 중심사건이며 또한 바울의 설교와 가르침 전체의 중심이다”라고 한다. 심지어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마저도 헛것이라고 했을 정도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신학에 있어 핵심적 요소이며 구속사의 절정이었던 것이다(고전 15:14~17).

이러한 바울의 부활신앙은 고전 15장에 잘 나타나 있는데, 특히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과의 관계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들의 부활은 함께 서고 함께 무너지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첫째로 부활의 복음이야말로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밝히고(15:29­~34), 둘째로 죽은 자의 부활이 없을 때 어떤 결과들이 초래되는지를 설명하며(15:12­~19), 셋째로 부활의 순서가 어떠할 것인지를 교훈하며(15:23­~28), 넷째로 부활을 부인하는 악한 자들에게 속지 말 것을 권면한다(15:29­~34). 그리고 다섯째로 부활한 성도의 몸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설명한 후(15:35­~49), 끝으로 죽음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의 노래로 부활장을 마치고 있다(15:50­~38).
 
6. 맺는 말: 부활주일 설교를 위한 제언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부활을 부인하지도 않는데, 부활신앙이 201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그것이 지식적인 것으로 그치고 삶의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능력없는 신앙인의 모습으로만 머무르게 될 것이다.

사도행전 5장에는 복음을 전하다 공회 앞에 잡혀온 사도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5:33­42). 이 사건을 보면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한 구절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공회 앞에서 채찍에 맞으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갔다.”(행 5:41)는 구절이다. 얼핏 생각하면 여기 나타난 사도들의 모습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세상에 욕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매맞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에 핍박당하고 순교하는 것, 그 자체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인간인 이상 어느 누구도 고난, 그 자체를 기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고난을 기뻐했다.”고 하고 있다. 고난을 인내하더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고난을 참고 견디었다는 말도 아니다. 고난! 그 자체를 기뻐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꼭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결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연약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도 사람이 달라질 수가 있었는가? 세상도, 환경도, 변한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단 말인가? 그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이 강림했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이 사람들을 이처럼 완전히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즉 ‘부활신앙’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같이 엄청난 의미를 가지게 했고,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저들에게 무엇을 말해 줬는지, 어떻게 역사한 것인지, 깊이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들에게 부활은 단순히 죽은 다음에나 생각해야 하는 피상적인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먼 미래의 피상적인 이야기 아니라, 사도들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 힘있는 삶을 살게 하는 현재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부활을 믿었던 사도들이 그러했고, 스데반이 그러했으며, 바울이 그런 부활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자들로 살아갔던 것이다. 이것이 부활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마땅히 보여주어야 하고, 또 보여줄 수 있는 정상적인 모습인 것이다.

부끄럽지만, 이제 우리의 시선을 다시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로 돌려보자.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과연 이 부활신앙을 가진 자들로 우리 교회 안이 채워지고 있는가? 이 세상보다는 주님 앞에 서는 날, 그 앞에서 받게 될 평가에 더 가치를 두고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능욕을 기뻐하는 자’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이 세상만이 전부인 것처럼 현실기복적인 신앙에 매여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성도들은 과연 죽어도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자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하기 어렵다면, 이번 부활절을 맞아 우리 모두가 바울처럼, 사도행전 5장의 사도들처럼 부활신앙으로 재무장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올해는 이런 부활의 메시지가 모든 강단에서 울려 퍼져서 세속화의 위기 앞에 직면한 우리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부활신앙으로 재무장함으로 이 땅위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힘있게 살아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