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준(열린교회)

온 몸으로 진리를 살아내는 ‘존재의 울림’이 있습니까
값싼 영광과 번영을 예수 덕분에 이루려고 하는 생각은 얼마나 쓰레기 같은가​

 

▲ 김남준 목사
(열린교회)

오대산 거목들의 숲을 걸었다. 평균 수령이 오백 년을 넘긴 나무들이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 중에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산을 지켜온 나무들도 수다히 있으리라. 보이지 않는 땅 속 깊은 곳에서 그 뿌리들은 서로 얽혀 큰 산을 움켜쥐고 있었다. 세찬 비바람과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충만한 생명으로 산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 거목들의 숲을 홀로 거닐다 통곡하였다. 분재와 같은 그리스도인과 민둥산 같은 조국교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아아, 어쩌다가 우리 시대의 교회가 이렇게 되었는가. 이에 대한 답은 한 가지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마르틴 루터(M. Luther)는 이렇게 답한다. “그리스도인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며 거룩하면서 속되며, 하나님의 원수이면서 그분이 자녀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옛 성품과 새 성품의 갈등을 보여주지만 시원하지는 않다. 칼빈(J. Calvin)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 예수와 함께 한 형제, 상속자가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대답도 너무 주관적이고 내재적이다. 통합적이고 현실적이지 않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최소한 다음 네 가지 사실을 포함하여야 한다고 본다. 첫째로, 영적인 측면에서 그는 거듭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진 사람이다. 둘째로, 정신적인 측면에서 그는 회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사상적 관점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지성에 벼락을 맞은 사람이다. 셋째로, 성향적인 측면에서 그는 자기사랑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변화된 성향을 마음에 부여받은 사람이다. 비록 잔존하는 죄성과 여전히 갈등하지만 말이다. 넷째로, 생활적인 측면이다. 그는 믿음과 순종으로 언약 생활에 죽도록 헌신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종말론적 소망 안에서 세상에서의 노동과 문화변혁에 헌신하며 살도록 부름받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무시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한다. 그래서 교회는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갖고 있는 나쁜 인상을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러나 그 고민 끝에 나온 교회의 노력들은 비리로 얼룩진 기업이 경영의 위기를 타개해 보려는 대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대대적으로 이미지 개선 작업에 들어간다. 물의를 일으킨 관련자들을 징계하고, 임원진을 새로 교체한다. 문제가 된 사업은 접거나 축소하고, 광범위한 설문 조사를 실시한다. 또한 자신들이 사회에 선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직원들을 달동네로 보내서 연탄배달을 하게 하거나 무료 급식소를 차리게 한다. 그러고 나서 자신들의 이러한 변화를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알린다.

오늘날 교회가 하는 일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나는 세상의 비난을 참착해서 자신을 개선하려는 교회의 노력들에 대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길을 잃었는지를 성경에 물어야 한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
존재의 울림이 있는가?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택하신 족속”이라고 부른다(벧전 2:9). 초대교회를 생각해 보자. 물론 그 시대가 모든 것에 있어서 완벽한 표준을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에 위대한 각성이 일어날 때마다 초대교회의 신앙은 표준으로 회자되었다. 13세기 가톨릭의 개혁운동의 시대가 그러했고, 16세기 종교개혁의 때도 그러하였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기독교가 보편화 되어 있던 종교개혁 시대보다는 이방문화에 에워싸였던 초대교회 시대와 흡사하지 않는가?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가?”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캅은 로마가 기독교를 핍박하던 시기에 교회를 보살폈던 인물로, 소위 속사도 교부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폴리캅의 순교>라는 책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이방인들의 평가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족속들이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이방인들에게>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스트로마타>라는 글에도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소개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을 ‘제3의 족속’이라고 불렀다(6.5.41). 이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이나 이방인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사는 족속이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영웅전>으로 잘 알려진 고대 로마의 그리스 작가인 플루타르코스는 78편의 수필로 이루어진 <도덕론>이라는 책을 집필하였다. 이 책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상을 엿볼 수 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위험한 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해 로마 법정에 피고로 서기도 하였는데, 그들에 대한 묘사는 이렇다. “(로마의 신성한 판결의 피고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고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족속들입니다.”

이 외에도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가운데 “멜리토”라는 글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 사람들이 당시 그리스도인에게서 받은 독특한 인상이었다. 이는 오늘날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받는 인상과 얼마나 다른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들에게 있는 무엇인가가 우리에게는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현대교회의 선각자인 프란시스 쉐퍼(F. Schaeffer)가 당시 미국교회의 복음주의에 대해 외친 것은 오늘날 조국교회에서도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이름만 복음주의일 뿐, 맛 잃은 소금이며 빛 잃은 등불이다.”

최근에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었다. 어느 고등학생이 형에게 놀러갔다가 근처에 있는 절에 들르게 되었는데, 그 학생은 절을 구경하다가 마당에 나와 있던 한 젊은 스님에게 몇 가지를 물었습니다. “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신가요? 왜 이렇게 이상한 옷을 입고 있습니까?” 스님은 아이를 방 안에 불러 말을 이었다. “인생은 무상한 것이다”라는 주제로, 한동안 문답이 이어졌다. 스님과의 짧은 만남을 마친 학생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부모님에게 이렇게 선언하였다. “출가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대대로 유교를 신봉하던 부모님은 처음에는 이해를 못하였다. 그때 일본에 유학을 통해 불교에 다소 식견이 있던 형이 부모를 설득하여 결국 그 고등학생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그리고 70세가 넘어서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그때의 경험을 책에 담았는데, 그 책에서 그는 어린 학생이었던 자신에게 선문답을 건네던 그 사람이 바로 고(故) 성철 스님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글을 읽는 내내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풍경이나 감상하러 절을 찾은 어린 학생의 마음을 움직여 인생에 대한 결단을 내리게 하였을까? 한 시간 남짓한 대화로 그의 마음을 움직여 거의 60년 동안 후회 없이 한 길을 걷게 한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홀로 고민하던 내 입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말이 있었다. “존재의 울림!”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분명히 존재의 울림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인으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비기독교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이 던져주는 울림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는 <보편교회 교인의 생활방식과 마니교인의 생활방식>에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들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한 변화된 삶의 방식 뒤에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있었다(행 20:21).
 
온 몸으로 진리를 살아내는가?

고통받는 세상의 모순적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윤리적 책임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이것은 임마누엘 칸트(I. Kant)에 의해 제시된 명제 곧 “하나님은 실천 이성이다”를 맹종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문화의 변혁을 위해 부름받았음을 믿지만,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이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변화를 위해 악과 분투하고 죄의 질병적 징후를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찮게 여기는 현실 도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초월적으로 완성되기까지, 분투하는 전투적 교회의 몸부림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현존의 영광을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윤리적인 사회, 그것을 넘어서 이 이상을 따라 살도록 부름받은 족속들이다.

조선시대 선비가 된다는 것은 대의(大義)를 위해 결기 속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곧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가치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그것을 따라 살고 죽을 수 있는 사상에 대한 신념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른다. 선비의 학문 탐구가 칼을 옆에 둔 자세로 이루어진 것은 삶 전체를 동반한 진리 추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사람이 학문을 탐구함에 있어서 4체(四體)를 주장하였다. 곧 온 몸으로 사물을 인식하고(體認), 온 몸으로 관찰하며(體察), 온 몸으로 체득하고(體驗), 온 삶으로의 실천(體行)이 그것이다. 자연계시의 희미한 빛으로도 진리는 온 몸으로 추구하여야 하는 것임을 알았다면, 오늘날 예수 없이 살던 때의 세속적 영광과 번영을 예수 덕분에 이루어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생각은 얼마나 쓰레기 같은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온 몸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따른 삶을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인이기에 그런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떤 사상적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 죄를 책망하고 죄인을 회개하게 하시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갈망하지 않는다면, 무지몽매함을 신앙의 이름으로 가장하여 지성을 무시하는 교회의 풍조를 갈아엎지 않는다면, 교회는 거친 세상의 파도 앞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조국교회는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신앙의 피상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여야 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현존이 존재의 울림이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모두가 염려하고 있는 교회의 도덕적인 위기 상태를 극복하는 길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조국교회에 부어주실 은혜를 기대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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