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봉 목사(기독교북한선교회 사무총장)

통일신학은 성경 근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통일신학 없는 통일은 혼란만 불러 … 예수 그리스도에 통일 가치 두고 예리해져야
통일은 구원론이며 교회론 … 책임감을 갖고 성큼 다가온 복음통일의 길 열어가자

 

▲ 이수봉 목사(기독교북한선교회 사무총장)

달포 전에 원로신학자가 구약성경에 기반을 둔 통일신학에 대해 연구발표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발표 후 질문 시간에 플로어에 있던 한 분이 “우리나라에 통일신학이 없으니 통일신학을 연구해 달라”고 주문을 했다. 그러자 논찬을 하신 분이 “지금 통일신학에 대해 발표하지 않았으냐”고 답변했다. 질문하신 분이 분위기 파악을 못한 것처럼 하고 넘어갔지만 이 에피소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청중이 공감할 수 있는 통일신학이 없는 것이다. 통일신학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수십 년이 넘었다. 그리고 시대의 변화를 읽은 신학자들이 통일신학이라고 시도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왜 국민들은 아직 통일신학에 대해 목말라하는지 자성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에 통일신학이 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 일어났다. 2016년 새해 벽두에 북한은 한 달 간격으로 핵실험과 미사일발사실험을 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을 폐쇄했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들의 대다수가 공감해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대한민국 전체가 논란에 휩싸였다. 이렇게 분위기가 어수선하면 정리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여러 단체들이 논평을 내놓았다. 우리 사회가 나갈 방향을 잡아주어야 하는 책임 있는 지도자들의 논평이니만큼, 범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통찰력 있는 문구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정치인들은 표를 의식하는 발언을, 이익집단은 이익에 따라 발언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는 통일신학적 기반에 기초하여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드러내 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교계의 논평은 어수선했다. 한국교회는 아직 통일의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통일신학 없는 통일은 혼란

이번 사태를 보면서, 통일신학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통일신학이 없는 통일은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둘째, 통일신학은 예리해져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대충해도 별로 표시가 안 나는 시간은 지나갔다. 이제는 구호만 외칠 때가 아니다. 좋은 단어만 나열해도 되는 때가 아니다. 외과의사처럼 현 시대를 해부해서 그 속뜻을 예리하게 드러내는 전문성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개성공단 폐쇄에 대한 논평에서부터 논의를 이어가겠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개성공단에서 벌어들인 연간 1억불 가량의 임금 소득 중 상당부분을 핵과 미사일 개발에 썼기 때문에 개성공단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논평이 우리가 준 돈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무기를 만들었느냐에 대해 긍정, 부정하는 입장에서 논평을 했다. 이에 대해 북한에서는 개성공단 임금과 핵실험이 시기적으로 맞지 않고, 핵개발 전체 비용에 비해 개성공단을 통한 수입이 적은 금액이라는 근거를 들어 반박했다. 한편 북한은 수출로 연간 76억불 정도를 벌어들이는데, 북한에는 마약, 무기 등 음성 경제가 많고, 장마당 경제와 같이 통계에 잡히지 않는 다양한 요인을 고려하면 북한의 연소득을 100억불로 추측하는 보도도 있다. 그렇다면 개성공단 수입과, 핵, 미사일 개발의 연관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124개 개성공단입주업체의 피해, 증가된 코리아 리스크 등의 피해가 훨씬 크고 40년의 남북교류 역사가 무색해져다는 이유로 박근혜 정부가 비난을 받고 있다. 득실 계산 없이 막연한 느낌으로 성급하게 한 패착이라는 비난에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남북관계에서는 현실도 중요하지만 느낌도 중요하다. 느낌의 중요성은 현실보다 중요할 때도 많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더라도, 느낌의 중요성까지 폐기시키면 그것도 세심하지 못한 것 아닌가 반문하고 싶다. 개성공단 폐쇄 후 박근혜 정부의 지지도가 올라갔다는 통계가 있다. 이것도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한반도에 존재하는 현실이며 해결해야 할 숙제다. 꼴통보수들의 못 말리는 짓거리로 치부하는 것은 경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는 대증적 반응이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좀 더 근본적인 접근을 한 것이 핵과 미사일 개발이 대미적 시도이며, 대남적 도발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감할 수 있는 분석이다. 북한이 미사일이 아니라 로켓이며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시도하는 것은 미국 본토공격 능력 확보다. 클린턴 정부 때부터 경수로회담, 6자회담 등, 핵문제와 관련하여 북한의 대화 상대는 늘 미국이었다. 그래서 핵문제는 우리나라가 나선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남이 될 수 없는 것은 북한의 전력 때문이다. 북한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전범국이다. 또한 냉전시대만이 아니라 남북교류가 진행 중에도 국지적 도발을 최근까지 계속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한반도에서 쓰려고 핵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보여주지 않는 이상 의심을 씻을 수 없다.

좀 더 나가보면 핵문제의 근저에는 북한의 체제불안이 있다. 북한은 한국전쟁 때부터 미국에 대한 피혜의식과 적대감이 있는데다가 아직도 주한미군이 북한의 위협으로 존재하고 있다. 미국이 북한에게 체제 안정을 확신시켜주지 않으면 북한 핵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핵문제 해결의 열쇠

그러면 평화협정이 핵문제의 열쇠가 될 수 있는가? 최근 북한은 미국에 평화협정카드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을 믿지 못하고 있다. 안보리 대북제제, 미국, 일본, 중국의 국가적 제제, 세컨더리 보이콧 등으로 북한에게 본때를 보여주려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고생을 시키고, 진실한 협상을 할 수 있을까? 미국은 협상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굴복시키려는 것 같다. 힘 있는 자가 생각할 수 있는 카드지만 역사가 증명하듯이 힘은 편리한 도구지만, 잠정적 해결은 가능하지만 근본적 해결은 불가능하다. 장기적으로는 약자의 반란에 골머리를 앓게 될 것이다. 그 증거가 테러다. 힘은 약자들의 반동적 단합과 비법적 반항을 야기한다. 그렇다고 북한과 평화협정으로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음 논리가 원 코리아다. 최근 조선일보가 커트 캠벨 전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의 주장을 보도했다. “한반도 통일에 대해 미국 정부 내에 그간 상반된 정서가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졌고, 이제 통일만이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등과 같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해법이라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하고 “원 코리아 개념을 더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필자가 생각할 때 가장 설득력 있는 근본적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분단 상태가 존속되는 한 핵문제는 상존한다고 봐야한다. 결국 우리는 ‘어떻게 하면 통일할 수 있나?’라는 근본적인 문제, 이 문제를 피해 가서는 결국 모든 노력이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문제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통일과 관련하여 경계해야할 것이 있다. 흡수통일은 통일이 아니라 점령이라는 것이다. 흡수통일은 분단적, 경쟁적 가치다. 또한 교류협력에 의한 평화정착은 적대감을 해소하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이해관계에 봉착했을 때 평화가 깨질 수 있고, 평화에서 통일로 넘어가는 문제에서 막연해진다. 2% 부족한 논리다. 이런 문제를 넘어서는 방법이 무엇인가?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바로 통일신학이다.

통일신학은 통일하자는 주장보다 근본적인 것이며,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것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통일신학 통일은 무엇이며,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 지를 성경에 기초하여 원리적으로 제시하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

통일신학을 함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개인주의 혹은 이기심이 첫번째이고, 두번째는 분단적 가치와 통일적 가치의 구분이다. 개인주의와 분단적 가치는 타락의 결과다.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나에게 유익해야 하며, 남보다 내가 잘되어야 하고, 남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뿌리 깊은 문제다. 인간의 탈을 쓰고 사는 이상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남북관계는 중요하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은 남한 중심적이다. 남한이 주도권을 잡아야 하고, 북한에 이겨야 한다. 작년 8·25합의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태도는 이기적, 분단적, 경쟁적이었다. 이런 평가 기준이 없으면 국민들도 이기적, 경쟁적 가치에 따라 반응하게 된다. 통일은 통일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해서 통일적인 것이 아니다. 통일의 가치를 담아야 하는 것이다.

통일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

그렇다면 통일의 가치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죄인과 같이 되셨다. 북한과 같은 입장에 서야 통일할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죄인의 짐을 지셨다. 죄를 지적하지 않고 자기가 죄를 지은 것처럼 하셨다. 허물을 어떻게 보느냐가 통일의 관건이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한 몸이 되셨다. 예수님은 우리와 공동운명체가 되셔서 유기적으로 소통하셨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타락한 사람과 통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통일은 구원론이며, 교회론이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의 통치만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통일도 있다. 통일은 타락하기 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상태다. 하나님과 피조물이 평화한 상태, 조화와 균형의 상태, 모든 피조물의 고유 가치가 존중되는 상태, 여기서 통일의 상태를 볼 수 있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이 성취하실 종말론적 성취이며, 원초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다. 통일은 하나됨 이 전에 개체의 다양성이 풍성함을 전제한다. 다양성과 통일성의 역동성을 함유하고 있는 개념이 코이노니아다.

이와같이 통일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풍성한 개념이다. 통일신학은 분단의 현실을 담아내야 하지만 성경의 근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통일신학은 신론이며, 인간의 원초적 타락의 문제를 논하는 인간론이요, 기독론이며, 구원론이며, 교회론이며 종말론이다. 여기서부터 개성공단 폐쇄의 문제를 논평해야 하나님이 드러나고, 복음통일의 길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요즘 통일의 문제가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개성공단 폐쇄는 통일의 후퇴가 아니라 통일이 얼마나 무르익어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충격이라고 생각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통일신학의 필요성과 완성도에 대해 급하지만 조금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올해는 한 달여 어간에 여유를 부리다간 큰 낭패를 보겠다는 조급함을 느꼈다. 교단도 통일신학의 문제를 제대로 풀어낼 수 있는 전문가 풀을 만들어 하나님 앞에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한다는 순수함과 거룩함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이제는 전문가도 전문가가 아닐 수 있다는 정도의 겸손함과 예민함으로 통일의 문제를 다룰 때가 되었다. 정부도 국민도 성도들도 통일이라는 시대상황 앞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장자교단은 책임 있는 행동으로 시대를 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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