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알라는 결코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다

‘전지·전능·무소부재’ 신의 특성 같으나 인간과 인격적 교제 없으며 삼위일체 부정
독생자 예수 이 땅에 보내 대속하는 사랑 존재하지 않아 … 하나님 왜곡 경계해야

 

▲ 유해석 선교사

해가 갈수록 종교다원주의가 거세게 불어 닥치고 있다. 2009년 국민일보에서 실시한 ‘한국인의 이슬람에 대한 인식’이라는 설문조사에 따르면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이름만 다를 뿐 사실은 같은 신을 섬긴다’는 응답이 24.3%나 됐다. 2015년 크리스천투데이에서 실시한 ‘한국 기독교의 이슬람에 대한 인식’이라는 설문조사에서도 ‘기독교와 이슬람의 관계가 뿌리가 같거나 동일하다’ 라고 답한 사람이 목회자와 성도들을 합쳐서 30% 이상이며,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다고 대답한 사람은 목회자 10%, 평신도 27%로 나타나 이슬람에 대한 심각한 이해부족과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슬람의 경전인 한국어 꾸란에는 알라를 모두 하나님으로 번역해 놓았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더 왜곡될까 심히 우려스럽다. 꾸란과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견해는 변할 수가 없다. 따라서 꾸란과 성경을 통하여 두 신(神)이 가지고 있는 속성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슬람에서는 알라를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꾸란의 알라를 의미한다. 꾸란은 이슬람의 근원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본래 아브라함이 무슬림이었으며 유대교와 기독교의 뿌리는 이슬람이었다고 가르친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타락하여 그 본래의 원형이 변질되었기에 알라가 마지막 선지자 무함마드를 보내서 그 원형을 복구하였는데 그것이 이슬람이라는 것이다. 이슬람의 가르침대로라면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은 원형인 이슬람의 하나님 즉 알라에게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아랍어의 신(神)개념 “알라”는 “유일한 진리이고 우주적인 신”이다. 중동에서 아랍어를 사용하는 기독교인들의 성경에도 하나님을 알라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알라와 하나님은 동의어이다. 그러나 이름이 같다고 해서 꾸란의 알라와 성경의 하나님이 동일한 본질과 성품을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神)의 초월성(transcendence)

하나님과 세상이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면에서 꾸란의 알라는 자연신앙적이다. 정통 이슬람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격적인 교제가 나타나있지 않다. 또한 이슬람의 알라는 창조물에게 속한 모든 속성과 상태를 초월한다고 이해하고 있기에 예수님의 성육신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알라의 유일성에 관하여 “그 분은 낳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는다. 그 분은 측량할 수 없고, 가리개로 가릴 수도 없다. 그들은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분을 파악할 수 없다. 그 분은 사람이 측량할 수 없고, 어떤 피조물이라도 어느 영역에서도 그와 비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알라는 물질적이거나 육체적이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며 ‘알라의 품성’은 그 누구도 알라 같지 않다는 주장과 같이 제한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어 특정기간 동안 자신을 제한했다고 믿는다(빌 2:6~8).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은 하나님은 영, 빛 그리고 사랑 등과 같이 긍정적이다. 그러나 꾸란에 나타난 알라의 성품은 인격적이지 않다. 알라란 특별한 모습으로, 육체적, 인간적, 물질적 또는 다른 어떤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 알라는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도 그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는다. 무슬림들은 “알라는 모든 것을 에워싸고 계시도다”(꾸란 4:126)라는 꾸란 구절에 근거하여 알라가 가깝고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사랑이 있고 용서하시고 자애로운 인격적인 알라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친밀성과 성품은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알라가 인간에게 아무리 가깝게 있다 해도 알라는 인간 속에 내주(the indwelling God)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인간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이다(고전 3:16).

또한 알라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종이나 노예의 관계이다. 각 사람은 자신을 알라와 그의 뜻(아랍어로 아슬라마, aslama-자신을 복종시키고, 맡기고, 알라께 자신을 완전히 드리고, 자신을 알라의 뜻에 헌신하고, 무슬림이 되는 것)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이다. 이 알라를 향한 관계는 부복을 통하여 표현되는데, 매일 다섯 차례 의식적인 기도를 하는 동안에 수행해야 한다. 알라를 부르는 자는 그 분의 자녀라 하지 않고 종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알라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천지의 모든 것이 종으로써 알라께로 오기 때문이라”(꾸란 19:93). 결국 이슬람의 알라와 그를 믿는 무슬림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고 주인과 종의 관계인 것이다.
 
이슬람은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이슬람에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철저하게 부정한다. 삼위일체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세 위격이 영원한 한 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삼위일체 교리는 비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신성 모독적이라고 이해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삼위일체에 대하여 꾸란은 분명하게 거부한다. “알라는 셋 중에 하나라 말하는 그들은 분명 불신자이라 알라 한 분외에는 신이 없거늘 만일 그들이 말한 것을 단념치 않는다면 그들 불신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벌이 가해지리라”(꾸란 5:76)고 가르친다.
이슬람의 알라는 단순히 단일 신(神)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단일체(體)에 다른 위격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단일성이 알라의 특이성이며 신성을 공유하는 위격에 대한 교리를 결코 수용할 수 없게 한다. 알라는 절대적이며 초월적이다. 이러한 알라의 단일성은 꾸란 112장에 강조된다. “알라는 단 한 분이시고 알라는 영원하시며 낳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아니했나니 알라와 대등한 자 세상에 없도다.”

여기에서 유일의 의미로 사용된 아랍어는 아하드(ahad)이고 숫자적 단일을 나타내는 와헤드(wahed) 와는 다르다. 아하드(ahad)는 삼위일체를 배제하는 유일함의 뜻에서 특별한 의미의 단일성이다. 아랍어를 할 줄 아는 기독교인들은 삼위일체 신을 언급할 때 와헤드(wahed)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기독교는 “하나의 하나님이 아닌 세 명의 신(神)을 섬긴다”고 비판한다. 이슬람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다신주의자인 셈이다. 또한 삼위일체를 하나님과 마리아와 예수님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삼위의 관계를 하나님과 마리아와의 성적인 관계를 통하여 예수님을 낳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꾸란에서 말하는 삼위일체는 찾아볼 수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는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하나님의 연합체 내에 복수성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련하여 성경에서 사용된 두 개의 히브리 단어가 있다. 첫 번째 단어는 ‘이카드(echad)’ 통합체를 나타내는 복합통일체 명사이다. 이 단어는 ‘하나’를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존재들을 포함한다. 다른 히브리어는 ‘야키드(yachid)’인데 이는 절대적인 ‘하나’인 수학적 통일체로서 사용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이카드와 야키드 두 단어를 모두 사용하셨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야키드를 사용하셨고, 하나님이 자신 본성의 복수성, 즉 복합적 통합성의 단일성을 말씀하실 때는 이카드를 사용하셨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이에 대한 이해가 없다. 따라서 꾸란의 모든 부분이 우상숭배에 반대하고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며,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무슬림과 다른 개념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을 믿는다(막 12:29, 고전 8:4~6, 야고보 2:19).
 
성령과 가브리엘

기독교인의 ‘하나님의 영’ 즉 성령에 대한 믿음을 무슬림은 신성모독이라고 믿는다. 꾸란은 “영”이라는 단어를 20번 사용하지만 이 단어가 사용될 때 마다 시체를 관통할 수 있는 신비적인 육체를 가진 창조된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꾸란 16장 102절에 꾸란에 영감을 주는 개체로서 성령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영 혹은 성령은 천사 가브리엘을 의미한다. 가브리엘은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주는 통로로서 꾸란에 두 곳에 나타난다. (꾸란 2:97, 66:4). 꾸란은 성령과 천사 가브리엘을 혼동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예수가 성령으로 인해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었다고 말한다. 이슬람에서는 성령을 하나님으로, 또는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영원히 공존하는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만 천사 가브리엘의 또 다른 이름 정도로 나타나있다.
 
하나님의 사랑

꾸란에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우리의 의무에 대한 강조를 찾아 볼 수 없다. 성경은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 반역한 죄인일지라도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꾸란의 알라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불신자를 사랑하지 않는다(꾸란 3:32절). 알라의 99개 이름 가운데 “사랑하는 자”(Al-Wadud) (꾸란 11:90)가 있다. 사랑은 관계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꾸란의 알라는 그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아랍어에서 알 와두드(Al-Wadud)는 동사 와다(wadda)로부터 발생했고 이것은 친절이라는 의미이다. 친절이 “사랑”의 부분적인 측면을 뜻하지만 사랑의 완전한 깊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알라의 사랑은 그가 창조물에 대해 자비와 관심을 베푼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은혜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것은 인격적, 지속적인 사랑은 아니다. 이슬람에서 속죄하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셨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롬 8:35~39, 엡 3:17~19). 꾸란의 알라는 기독교의 사랑의 하나님과는 아주 다르다. 또한 사랑은 알라의 주된 속성이 아니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속성 가운데 전지(모든 것을 알고 있고), 전능(무엇이든지 가능하며), 무소부재(어디에나 존재한다)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이러한 신(神)의 특성만 본다면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이슬람의 알라는 인간과 인격적인 교제가 없으며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신(神)이라는 측면에서 공통된 부분이 있으나 내재된 속성에서 같은 하나님이 아니다. 이슬람의 알라는 결코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다.

▨ 유해석 선교사는
총신대학교(B.A.)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equiv.)을 졸업했고, 영국 웨일스대학교 신학/이슬람학부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받았다. 또한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Ph.D) 과정을 수학했다. GMS 파송선교사로 오엠선교회와 협력해 이집트에서 사역했으며, 현재 FIM국제선교회 대표로 있다. 또한 총회이슬람대책위원회 전문위원이며 칼빈대학교신학대학원 강사이다. 저서로는 ‘우리 곁에 다가온 이슬람’(생명의말씀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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