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적 교회로 다시 새로워져야 한다”
한국형 선교모델 개발 앞서 선교현장 고민 선행적 성찰 필요
올바른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열정은 공세적으로 밝혀가야

 

선교신학자 김성태 교수의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선교역사와 신학 전반을 꿰뚫는 해박한 지식과 학자적 소신으로 김 교수는 한국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새로워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길은 성도들을 제자로 양육하는데서 시작한다고 그는 말했다.<편집자 주>


 

▲ 김성태 교수는 한국 선교계의 침체에 대해 “선교신학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최근 세계 선교학계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이슈는 무엇입니까?
=첫째 레슬리 뉴비긴의 복음과 문화 운동을 통해 유래된 ‘선교적 교회’ 운동입니다. 미국에서는 교인들을 소그룹이나 회중형태로 조직화하여, 스스로가 성경공부, 직장선교, 전도 및 선교를 통한 재생산 더 나아가서 구호 및 구제, 지역사회 개발에 나서게 하는 등 총체적 선교구조를 지향하는 운동이 나타났습니다.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에서는 소그룹 가정교회를 만들어서 교회 자체가 일종의 경제적 자생력을 갖춘 채 끊임없이 교회를 재생산, 확대하는 작은 교회운동이 보입니다.
한국에서는 작은 교회운동이 선교적 교회운동의 일환으로 나타나고, 지역교회 가운데 대형교회에서 미국에서 일어난 선교적 교회운동을 변형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교적 교회 운동’의 신학적인 문제는 교회관이 경건주의 신학적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활동을 통한 구원의 확증, 즉 세미펠라기안적 올무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부분은 평신도의 지도력개발, 토착화된 성경공부, 전도와 양육, 직장에서의 소명의식, 선교강조 등입니다.
둘째 종말론적 선교운동이 강조되는 가운데 ‘세대주의적 선교운동’이 19세기 말처럼 다시 한 번 각광을 받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이크 비클의 IHOP 운동이나 예루살렘 운동이 그것입니다.  이들은 신학적으로 패쇄적이고, 승리주의, 열광주의이며 극단적 성향이 있습니다. 장점은 선교의 열정과 헌신, 뜨거운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적 종말론이 선교의 동기부여가 되어야 합니다. 칼뱅, 코튼 마테르, 화란의 제2의 종교개혁 지도자들에게 배워야 할 것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타종교와의 관계 등이 큰 신학적 이슈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의 제한적 보편구원설 등을 경계해야 합니다. 노만 앤더슨, 레슬리 뉴비긴, 로버트 콜맨 등이 이런 주장을 합니다. 선교를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제 삼의 길도 있을 수 있다는 이론을 주장하는 클락 피노크, 존 샌더스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통하지 않고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보통은총 영역 가운데 선교의 접촉점, 즉 카이로스가 있음을 발견해야 하는데 반틸, 요한네스 바빙크가 대표적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배려함이 없는 충돌형, 무례형 선교는 경계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이해 없이 일방적 복음 선포는 안 됩니다. 또 인사이더 운동도 주목받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지나친 회색 경계선은 위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내 선교학자들과 학계가 관심을 갖고 있는 학문적 이슈 및 교회현장에 전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 첫째 한국적 자 선교신학화의 강조입니다.
1912년에 시작된 한국장로교회의 선교역사는 바로 한국교회 선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온갖 시련과 고난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두 번째의 선교하는 교회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시행착오도 많았으나 이제는 한국교회의 선교특징을 가진 한국형 선교모델과 전략을 개발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선교신학화 운동입니다.
저는 이 운동의 취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역사적, 신학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가운데 한국선교사들만의 강점을 찾아내어서 이것을 극대화하고, 세계복음주의교회 앞에 적극 소개하여 세계선교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점도 있습니다. 한국형 선교모델을 개발하기 전에 한국선교사들이 선교현장에서 무엇을 실패했고, 어떤 시행착오가 있었는지를 무엇보다 먼저 선행적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또한 한국선교사들의 선교모델과 전략이 성경적, 신학적으로 옳았는지 선교의 대선배가 되는 서구교회 선교지도자들이 한국교회의 선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혹 비판하고 있다면 왜 비판하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한국형 자 선교신학화가 폴 히버트가 제시한 통문화 선교신학의 모델과 무엇이 다른지, 개혁주의 선교신학자들의 다면적 선교신학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신학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혹 민족주의적, 종족 중심적 성향이 숨어 있지 않은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둘째 이슬람포비아와 이슬람선교입니다.
이슬람의 세계적 확산과 근본주의 이슬람운동의 위협 등으로 한국교회에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슬람에 대한 경계심을 높게 만들었던 데에는 2004년 5월 31일 이라크 알 카에다인 ‘유일신 성전파’의 김선일씨 피납 및 참수사건, 2007년 7월 아프카니스탄으로 단기선교여행 및 봉사활동으로 간 분당샘물교회 청년회 팀의 알카에다에 의한 납치 및 두 사람의 참수, 2014년 2월 16일 이집트 시나이반도 성지순례여행 중이던 진천 중앙교회교인들이 탄 버스가 피폭 및 4명 사  망, 2015년 1월 터키여행을 간 김 모군이 한국목사님의 안내를 받던 중에 시리아로 들어가 IS에 가입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교회에 이슬람포비아가 급속히 확산되었고 최근 이슬람의 한국진출에 대한 움직임 때문에 경계심이 증대됐습니다.
그러나 이슬람포비아는 이슬람선교에 가장 위험한 장애물입니다. 이슬람의 종교체제, 교리, 선교전략 등은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경계하고 선교적 대안을 찾아야 지만 무슬림을 증오하거나 혐오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복음의 구원 대상으로 여기고, 오직 성경적 방법, 신학적으로 타당한 선교방법을 찾아서 무슬림복음화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선교사 파송 숫자 증가세가 꺾였고, 교단과 선교단체들의 선교사 후보생 숫자가 급격하게 줄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고, 이런 현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이것은 한국교회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 세계적 현상입니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그에 따른 교회성도들의 헌금감소는 자연스럽게 선교위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현재 세계적인 선교단체들이 모금이 잘 안되어서 선교현장의 프로젝트를 줄이거나, 규모를 축소시키거나 내부 인원을 구조조정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선교사 영입에 큰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로 한국경제외부 지표는 그렇게 심각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실제적인 경제지표 즉 실물경제는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전문가들이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교회성도들의 수입이 줄어들고, 결과는 교회헌금이 줄어 든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확실한 통계는 없지만 약 15~20%의 교회재정의 감소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목회하는 목회자들은 교회재정의 압박감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교회도 내부 인력을 구조조정하거나 모든 프로젝트들을 축소하는 경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피해를 많이 보는 것이 파송선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협력선교사는 본인들에게 아무런 통보 없이 일방적으로 선교비를 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가 직접 파송한 선교사도 교회재정의 어려움으로 선교비를 줄이거나 아니면 선교비 보내는 것을 중단하고 귀국할 것을 종용하기도 합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선교사가 우리 교단 GMS 산하에도 100 명이 훨씬 넘는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물론 외부적 환경요인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신학적이고, 본질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선교가 경쟁적 물량적으로 이루어진 면이 있었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선교사를 파송하긴 하지만 아무런 선교전략도 계획도 없고, 모든 것을 선교사에게 맡긴 채 교회는 오직 재정지원만 할 경우 이런 문제가 쉽게 나타납니다. 교인들이 왜 선교해야 하는지, 파송선교사가 무엇을 하며,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를 때 교회가 어려워지면 아무 생각 없이 쉽게 선교사의 지원을 중단하게 됩니다.
지역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원할 때 모든 교인들이 왜 선교해야 하는지, 본 교회를 통해 파송 받은 선교사가 선교현장에서 어떤 선교사역을 하며, 그것이 무슨 의의가 있는지 확실히 알아야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참여해야 합니다. 선교사를 파송해도 선교사가 선교현장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왜 지교회가 특정 선교현장으로 선교사를 파송했는지, 아무런 의미도 모른다면 그 선교는 반드시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신학적으로 선교는 교회의 본질이며,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순종하고, 수행해야 할 필수적 사역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선교신학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교적 교회가 되기 위해 교회현장에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한국교회 뿐 아니라 모든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표하는 신적 기구로서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어디에든지 증거하도록 세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20장 21절에 나타난 선교의 뜻입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적 교회운동이 가진 장점들은 최대한 개발하고, 신학적으로 위험한 점은 철저하게 경계하고, 무엇보다 장로교회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이미 성찰한 선교적 교회의 본질을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해야 합니다. 모든 평신도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시키며,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현장인 가정, 직장, 이웃과의 관계에서 전도와 선교의 열매를 맺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키워야 합니다. 성직자 중심(Clericalism)의 교회구조가 아니라 성직자가 지도력을 가지되, 평신도들을 저들의 삶의 각 분야에서 선교적 삶을 살며, 하나님의 일꾼 의식을 가지며, 전도와 선교의 열매를 맺도록 동역자로 키워야 합니다. 헨드릭 크래머가 말한 것처럼 평신도가 ‘얼어붙은 냉동 칸’의 자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세계복음주의연맹(WEA) 지도자 대회를 한국에서 주관한다고 발표한 가운데 WEA가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WEA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한국교회와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하는 것이 바람직합니까?
=세계복음주의연맹은 1846년 영국과 미국, 캐나다를 중심으로 일어난 제2차 복음주의각성운동의 영향으로 생겨 난 것으로 당시 다윈의 진화론에 신학이 직격탄을 맞고, 서구사회는 노예문제, 어린이 노동 등으로 교회가 분열되어 있을 때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즈, 스웨덴, 독일, 프랑스, 화란, 스위스, 미국과 캐나다 등지에서 개혁교회가 주축이 된 복음주의 교회지도자들이 런던에 모여서 결성을 한 조직입니다. 이 조직이 계속 확산되다가 1951년부터 2001년까지 세계복음주의친교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로 이름이 불리게 되었습니다.
2001년도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이름을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으로 바꾸었고, 현재 129개국에 각 국의 복음주의연맹이 있고, 약 6억 명의 복음주의 교인들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조직이 되었습니다. WEA의 신학은 영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약학자인 레온 모리스의 신학진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 즉 성경무오설과 불오성을 믿으며 그리스도의 복음 아니면 다른 어떤 길도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확실하게 천명합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덕성으로 구원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함을 믿고 있습니다. 복음주의자란 말 뿐 아니라 행실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실천이 있어야 함을 천명합니다. 즉 말과 행위가 일치되는 신앙인이 복음주의자라고 하는 것이다.
레온 모리스가 정의한 WEA의 신학은 한국의 혹자가 우려하는 자유주의 신학과는 거리가 멉니다. WEA의 역대 지도자들과 현재 지도력을 보아도 그들의 신학배경은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입니다. 만일 한국의 장로교회, 더 크게 복음주의교회가 WEA를 부인한다면 한국교회는 전 세계에서 교류할 대상이 전혀 없게 될 것입니다. WEA는 일종의 복음주의자들의 친교모임이고, 복음주의자들의 공통된 관심과 신학적 일치와 특정 사회적 이슈에 대한 세계복음주의자들의 연합된 의견표명이며, 더 나아가서 선교의 공동전선입니다. WEA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WCC 산하 NCC 대표였던 사람이 갑자기 한국복음주의교회를 대표하는 기관의 장이 되어 WEA 대회를 유치하려 할 때 이것이 한국의 복음주의교회지도자들에게 혼란과 혼선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신학적 분별이 아니라 대형교회 지도자들 중심의 정치가 작용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더 큰 문제입니다. 본 교단총회는 한국의 보수교회, 복음주의교회를 대표하는 개혁교회의 중심으로서 WEA와의 협조나 대회개최에 실상 주인공 의식을 가지고 나서야 합니다. 문제는 WCC 유치에 앞장서던 인물이 어느 날 갑자기 WEA유치를 주장하며, 주도권을 행사할 때 여기엔 신학의 정조도, 분별도 없는 혼란이 가중될 뿐입니다. 여기에 우리 교단의 당황함과 또한 딜레마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주도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우리가 활동해야 할 무대가 소위 회색지대의 사람들에게 난입 당한 것입니다.

▲보수교단들이 세계교회에 복음을 전하고 보수적인 신학을 전하기 위해서는 세계교회와 교류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보수교단 특히 총회가 취할 수 있는 세계교회와의 교류방안은 무엇이겠습니까?
=보수신학을 전하기 위해서 WCC와 교류를 해야 한다는 일부 본 교단 지도자들의 발언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WCC는 이미 돌이키기에는 그 신학자체가 너무나 좌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WCC의 좌경화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후기불트만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성경관이 이미 1970년대에 변질이 되었고, 사회구원운동인 미시오 데이(Missio Dei), 종교다원주의가 1960년대 말부터 WCC의 내부 구조에 반영되었습니다.
그동안 조정주의 신학자(Conciliar Theologian)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WCC와 복음주의 교회를 서로 일치시키려는 운동을 줄기차게 벌였으나 오늘날 그 신학적 간격과 괴리는 더욱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유신론과 무신론이 서로 합치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본 교단의 지도자들은 신학적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연합운동을 해야 합니다. 신학적 분별없이 개혁교회와의 교류라는 명목으로 학위과정을 교류하거나 신학대회를 유치할 때 여기에도 위험성이 있습니다. 유럽의 개혁교회는 우리가 이해하는 보수신학의 개혁교회가 아닙니다. 유럽 개혁교회의 신학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 분명하게 그 위험성이 나타납니다. 특정 교계의 정치지도자가 카리스마틱한 지도력을 가지고, 원로 교수들의 위험성 지적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무시한 채 아직 연륜이 짧은 젊은 교수들 중심으로 신학교류를 시도할 때 바로 이것이 단초가 되어 총신의 보수적이고 정통적 개혁신학이 변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큰 댐이라도 아주 작은 균열 틈새로 무너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여러 위험성이 있지만 올바른 우리의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열정, 세계복음화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비전은 적극적으로 공세적으로 우리 교단의 지도자들을 통해 국내 뿐 아니라 국외로 오대양 육대주를 향해서 뻗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복음주의적 연합운동에 주인공 의식을 가지고, 사명감 있게 나서야 합니다.
우리 교단의 지도자들은 우물 안에 개구리가 될 수 없습니다. 정치적 연합이 아니라 신학적 분별을 가지고 연합운동에 앞장서야 합니다. 개혁교회 내에서의 연합 뿐 아니라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의 연합도 강화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국내외의 중요한 사회적 이슈와 여기에 대한 교회의 답변이 요구될 때 우리 총회는 우리의 신학적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야 합니다.

▲교수님의 올해 활동계획과 개인적인 소망을 말씀해 주십시오.
=금년 2월 말부터 8월 말까지 6개월 안식년을 얻었습니다. 미국의 코네티컷 주와 매사추세츠 주 그리고 보스턴 등지를 한 달여 여행하면서 미국 건국시대의 청교도 인들의 선교사상과 그 실천양식들을 연구할 계획입니다. 이미 이전에 몇 번 탐사했지만 이번에는 문헌자료 연구를 집중할 것입니다. 4월에는 두 군데의 선교지역 방문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한 나라와 구소련지역인 슬라빅 언어군의 4개의 나라들을 방문해서 그곳 현지 목사님들에게 한국교회를 소개하고, 특히 고난 받는 북한교회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앞으로의 선교를 위한 전략적인 연합을 의논할 것입니다.
저는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의 교수로서 25년 동안 후학들을 선교학으로 가르칠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하고, 항상 나 자신을 채찍질 하고 있습니다. 나이 60이 넘어가니 선교현장의 문이 열려지면서 한반도의 통일 이후 북한교회가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비전을 주시고, 활동하게 하십니다. 앞으로의 남은 인생은 북한선교와 통일 이후의 선교하는 북한교회를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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