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천 목사(분당중앙교회)

힘 있는 이가 정의롭고 자애로우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고,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다. 인생의 안타까움은 힘은 있으되 정의가 없거나, 인생에 대한 자비의 심정이 없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의도 자비도 있는데, 그것이 다만 마음뿐이지 실제적인 도움이 될 힘이 없는 경우이다. 역사 속에서 전자의 경우 언제나 형식논리나 위장술을 가지고 군림하고 인생들을 괴롭히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짐이 된다. 후자의 경우는 논리와 말 그리고 마음을 가지고 인생들을 설득하지만, 그 바름이 세상 속에서 힘의 논리나, 결집하기 어려운 모래알 특성에 밀려, 떠내려가 버릴 때가 많아 슬프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밥 한그릇 떠드리는 심정으로, 우리는 인생에게 그 밥 한 그릇 대접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까지 흘러온 역사 속에서 논리는 충분히 거론됐고, 그 사랑의 실천과 실천을 위한 설득만 남았다. 그런데 아직도 난감한 것은 실천보다 늘 선언만 난무하고, 그럴듯한 논리와 방법만 제시될 뿐이다. 그냥 주면 된다. 도움이 될 크기로 주면 된다. 계속 주면 된다. 이 세 가지가 없다면 우리는 진정성의 결여로 인해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다. 모든 일은 진정성을 확보해야만 성공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희생은 진정성 확보를 위한 첫 단추이다. 역사는 창조적 소수자에 의해 발전한다. 그러나 그 창조적 소수자가 되야할 사람들이 타락하면 지배적 소수자가 될 뿐이다. 이 지배적 소수자는 대중을 위한 사명과 헌신 희생 사랑 대신, 기득권에 연연하며 자신의 이익과 탐욕 그리고 심정적 유쾌를 위해 존재할 뿐이고, 그 역사는 고단함의 흑역사로 전락한다. 아무리 말과 논리가 그럴듯해도 무 자르듯 자른 자기희생이 포함되지 않은 언어와 문장은 공허하다. 가진 것이 많은 자만 자기희생을 치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뜨거운데 가진 것이 적다면 퍼센트로 자르고 평가하면 된다. 그것이 자기희생이다.

왜 규모의 진정성이 필요할까? 근래에 잘 하고 있는 일이기에 거론해도 오해가 없으리라. 단순한 한 사례일 뿐이다. 얼마 전 총회에 기구가 생겨, 미자립 교회를 돕기 위해 100억원의 기금을 모으기로 하고 최선을 다해서 감사하고 공감한다. 그런데 더 생각해야할 문제가 있다. 우리 총회 규모에서 좋은 일로 100억원을 모아본 적도 없겠지만, 100억원의 기금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필자가 속한 신설 노회에서 1년 전 미자립교회 20개를 선정해서 1년에 한 교회에 500만원씩 돕기로 하고 실행하고 있다. 노회에서 1년에 5000만원을 지원하고, 한 교회에서 1년에 5000만원을 지원해 1억원을 돕는 것이다. 일단 한 교회에서는 15년을 계획하고 지속하려 한다. 아주 큰 교회가 아니다. 노회도 같은 심정이라 생각한다. 일 년에 한 개 노회가 20개 미자립 교회를 조금 협력하는데 1억원이 든다. 약 150개 노회라면 각 노회별로 같은 20개씩 미자립 교회 돕는데 1년에 150억원이 지급돼야 한다. 감사하게 3000개의 교회가 조그만 협력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금액으로는 10년만 생각해도 지급액으로 1500억원, 20년을 돕겠다 하면 3000억원이 필요하다. 규모의 진정성이 없이는 좋은 마음의 뜻만 남긴 채, 또 상징과 선언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이 규모의 진정성을 위해서 총회는 결국 각 노회가 모두 함께할 수 있는 구조와 기쁨의 여건을 만들어야한다.

지속성의 진정성. 같은 내용을 실망하지 않고 그치지 않고, 10년을 노래하면 문화가 되고, 20년을 노래하면 전설이 된다고 믿는다. 어떤 일이든 시작했으면 20년은 해야 한다. 그리고 결과를 평가해야 한다. 역사란 매우 중요하다. 인생은 순간에 평가를 하지만, 하나님은 통괄적으로 평가하신다. 이리저리 비틀거려도 결국 끝까지 가야 한다. 무엇이든 약속대로 정한대로 해야 한다. 원칙을 세우기도 어렵지만, 정해진 원칙이라면 지켜져야 한다. 그리고 이 악물고 지속해야 한다. 원칙이 그냥 지켜지겠는가. 좋은 일이 왜 도전을 안 받겠는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는가. 끝까지 가야 한다.

진정성은 자기희생, 규모, 지속성으로 확보된다. 총회의 정책도, 노회의 정책도, 교회의 정책도, 성도 한 사람의 삶도, 주님의 사랑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실천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구원이 이 세상의 삶에서 실제화 의미화될 수 있다. 사람들은 떠들고 주장하고 자기 이익 챙기는 목소리에 우울해지고, 정직하고 바른 논리적 설득에 공감한다. 그러나 진정성을 가지고 따뜻함으로 꾸준히 끝까지 실천함에는 감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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