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태 목사(화평교회)

‘아무 할 말이 없는’ 공동체 만들어 갑시다
복음의 터 위에 세워진 균형 있고 좋은 소문을 내는 교회돼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살전 1:6)

한국교회 현실을 보면 1세기의 고린도교회보다 더 많은 파벌을 가지고 있으며 교회마다 갖가지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야 할 교회가 분열과 다툼으로 세상의 빈축을 사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데살로니가교회는 한국교회와 같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에 의해 제2차 전도여행시에 세워진 교회입니다(행 17:1~9). 바울은 늘 데살로니가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고 기도할 때마다 데살로니가교회를 기억했습니다(2절).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의 심중에서 떠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그 얼마나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인지는 본문 8절 하반절에 나타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하여 ‘아무 할 말이 없는 교회’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아무 할 말이 없는 교회라고 했을까요?
 
첫째, 균형 있는 교회였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3절)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넘치는 공동체였습니다. 믿음의 행위가 있었고 사랑의 수고가 있었으며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한마디로 균형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약 2:26) 사랑한다 하면서 수고가 따르지 않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될 수 있고(고전 13) 인내가 없으면 결코 소망을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롬 5:1).

바울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할 덕목이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고전 13:13). 어거스틴도 기독교를 특징짓는 세 단어가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교회에서 위대한 교회’의 저자 더그 베니스터(Doug Banister)도 위대한 교회는 균형 있는 교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무엇입니까? 균형 잡힌 삶입니다. 신앙생활의 극단은 위험합니다. 이단들의 삶의 특징은 극단적이고 기형아적입니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는 균형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회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습니다. 참된 교회는 균형 있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균형 있는 삶이었습니다(눅 2:52). 초대교회가 그러했고(행 2:47), 안디옥교회가 그러했습니다(행 11:26).

균형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 한국교회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겸비한 균형 있는 데살로니가교회를 보면서 더욱 균형 있는 위대한 공동체를 세워가는 일에 집중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중생의 근거가 확실한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4절)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성령의 단독적인 역사로 중생하지만 구원(중생) 받은 믿음은 행함으로 입증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풍성한 모습을 보면서 “너희 택하심을 아노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행실을 보니 확실히 구원 받았다는 것을 알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의 삶과 인격을 보면서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구원(중생) 받은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구원이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고 말하지만 이 말씀 후에 강조되는 것은 선한 행위입니다(요 5:24, 29, 렘 7:8, 10). 구원 받은 믿음은 분명히 행위로 드러내져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구별은 열매(행위)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행위, 혹 칭의와 성화를 유기적 관계로 보지 않고 별개의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삶 속에서 복음에 기초한 윤리적이고 거룩한 삶을 살아서 중생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가 봐도 중생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것을 다른 사람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답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복음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5절 말씀에서와 같이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큰 확신으로 세워졌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5절 말씀을 보면 바울의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 세 주간 동안 다른 것은 전하지 않고 집중적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그 바탕 위에 데살로니가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2장 13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말씀)의 터 위에 세워진 데살로니가교회는 아무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복음의 터 위에 세워지지 않고 율법주의나 계율주의 혹은 물질주의, 인본주의나 신비주의의 터 위에 세워지면 결코 건강할 수 없습니다. 오직 말씀 위에 세워진 공동체가 비바람이 치고 홍수가 나도 흔들리지 않는 위대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넷째, 본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6~7절)

데살로니가교회는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대로 순종함으로써 여러 교회에 본이 되었습니다. 또 데살로니가교회는 그리스도와 바울을 본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마게도냐와 아가야(그리스반도 전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 있는 모든 믿는 공동체(교회)에 본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청하고 있습니다. 또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말과 행실과 사랑의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라”(딤전 4:12)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도 밖에서도 본이 되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교회들도 다른 교회에 본이 되는 교회가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더 나아가 세상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본이 되어 복음에 기초한 수준 높은 윤리적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다섯째, 좋은 소문이 나 있는 교회였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 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8절)

예수님의 말씀대로(마 5:13~16)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이고 냄새이며 편지입니다(고후 2:14~15, 3:3~4). 데살로니가교회는 온 세상에 좋은 소문이 나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리스 반도 전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뿐아니라 믿지 않는 세상 속에서도 좋은 소문이 나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 온 지역과 나라와 세계로 나팔소리처럼 은은하게 퍼져 나갔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소문을 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섬기는 교회는 지역 교회와 주변 지역 사회에 어떤 소문으로 들려지고 있습니까? 복음의 복된 소문입니까? 아니면 부끄러운 악한 소문입니까?

데살로니가교회는 좋은 소문, 아름다운 소문이 나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면에서 너무나 잘 하고 있는 데살로니가교회를 향해 “아무 할 말이 없노라”고 외쳤습니다.


2016년 한 해도 데살로니가교회와 같은 ‘아무 할 말이 없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일에 우리 모두 함께 진력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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