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은성 교수(총신대학교·역사신학)

교리 교육은 교회의 중심체다
 

‘교리’라고 하면 무미건조하고, 듣던 것을 또 들어야하는 권태감마저 느끼곤 한다. 하지만 요즘 개혁신앙을 추구하고자 하는 교회마다 교리교육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 만화로 만들거나, 청소년을 위한 참고서를 만들어 교회교육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필자는 박사학위 마지막 단계에 구두시험(oral defense)을 받은 적이 있다. 후보자가 쓴 논문에 대해 교수들의 구두질문이 날카롭게 진행됐다. 이때 기억나는 질문 중 하나는 “왜 교회 역사를 배우느냐?” 또는 “교회 역사가 뭐냐?”였다. 교회 역사를 전공한 후보자에게 그야말로 본질적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시대가 종결된 후 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살피고 분석하고 해석하여 적용하는 것이다.”

독자에게 묻고 싶다. “왜 성경공부를 하느냐?” 다양하게 대답할 수 있겠으나 결국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고 나의 삶에 적용하기 위함이다”는 답변으로 집결될 것이다. 성경 인물, 사건 및 메시지를 통해 해석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성경공부는 해석에 목적을 둔다. 이것을 위해 목회자는 열심히 연구하고 실천하고 가르친다. 누구든 구원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 성경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명백한 진리로 나타난다. 하지만 구체적인 삶에 그 말씀을 적용하려면 복잡해진다.

중생된 자는 성경에 기록된 그분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 배우려고 한다.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해석을 위해 성경의 요약인 교리가 요구된다. 결국 교리 공부는 성경공부를 위함이다. 교리라는 도구를 통해 성경공부는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종교개혁자들이나 그 이후 청교도는 교리 공부에 주력했지만 타 교파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들이 직접 성령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해석한다고 자부하면서 보다 경건한 척한다. 자기 당착에 빠지고 극한 이기적 신앙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개혁신앙을 고수한 선배들이 우리에게 생명을 걸고 물려준 교리는 여러 가지다. 그 중에 우리는 6가지를 주로 인정한다. 개혁신앙은 6가지의 교리를 수용한다고 봐야 한다.

먼저는 유럽 대륙에서 수용하는 ‘일치를 위한 3가지 형식’(Three Forms of Unity)이다. 이 안에는 <벨지카 신앙고백서>(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1563), <돌드레히트 신조>(1619)가 들어 있다.

다음은 영국, 즉 청교도 신앙과 장로교 신앙이 수용하는 ‘웨스트민스터 교리’가 있다. 이 안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9),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1648)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1648)가 포함되어 있다. 소교리문답서가 현재 우리가 갖는 장로교 헌법에 담겨 있다.

‘신앙고백서’라 말할 때는 대체적으로 성경의 요약이고, 믿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교리문답서’라 말할 때는 교육용이고, ‘신조’는 주요한 교리 논쟁의 결과로 선포된 내용을 의미한다. 유럽용의 ‘일치를 위한 3가지 형식’과 영국용의 ‘웨스트민스터 교리’의 내용은 모두 성경적이고 큰 차이가 없지만, 강조점에 따라 생략되기도 하고 더 강조하기도 한다.

교리 공부는 교회 프로그램이 아니고 교회의 중심체이다. 그 이유는 교리 안에는 믿는 것과 사는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교리는 삶이라는 의미다.

많은 이들은 한국교회에 대해 염려한다. 수적 성장과 외적 번영으로 숨기려 하지만, 곪고 있는 상처나 질병에 걸린 몸을 장식물로 어떻게 감추거나 치유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변으로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자는 교리 공부를 외면하지 않는다. 교리 공부는 프로그램이 아니기에 한두 번의 배움으로 만족하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교리 전체의 맥을 파악하고 외우고 성경 해석과 삶에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 또한 기독교인의 삶의 전체에 걸쳐 이뤄지는 것이지, 취임식이나 장립식을 위해 준비하는 고시 문제집이 결코 아니다. 새신자만이 배워야 하는 입문서는 더더욱 아니다.

이러한 잘못된 개념이 교리 공부에 해를 끼치고 있고 교회 성도의 삶을 자라지 못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1문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에 대해서 묻고, 3문에서 “성경이 주요하게 가르치는 것”에 대해 묻는다. 놀랍게도 두 가지로 답변하는데 하나는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무)를 말한다고 답한다.

다시 말하면 1~38문은 믿는 것을, 39~107문은 삶을 설명한다. 이렇게 볼 때 교리 공부를 통해 성경을 해석하고 삶에 적용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게 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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