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시대에 부르는 희망의 노래 (애 3:18~25)

여전히 깊게 드리워진 어둠,
고난에도 희망 노래하며 반드시
승리하는 한 해 만들어 갑시다

 

▲ 홍문수 목사
(신반포교회)

201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금년 내내 여러분 모두에게 주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를 맞이할 때면 으레 ‘희망찬 새해’라며 기대감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쩐지 이 표현이 무색한 느낌입니다. 젊은이들은 사는 게 힘들어 연애, 결혼, 출산 등 세 가지를 포기한다는 ‘삼포세대’를 이야기하더니, 이제는 ‘오포’와 ‘칠포’를 넘어 아예 ‘N포 세대’를 말합니다. 한술 더 떠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라 지옥 같은 ‘헬(hell)조선’이라며 투덜거립니다. 어른들도 힘들어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직장인들은 언제 정리해고를 당할지 몰라 전전긍긍합니다. 사업을 한다고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100세 시대가 됐지만 노후의 건강이 염려되고, 그 긴긴 세월 무얼 먹고 사나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이런 가운데 새해의 전망조차 녹록하지 않습니다. 세계경제가 침체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세계 각국이 불황의 늪에 빠질세라 잔뜩 긴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경제우울증에 걸릴 정도입니다. 세계 각처의 테러도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경색된 남북 관계도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올해 총선을 앞둔 정치권은 이전투구를 일삼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희망찬 새해’라는 상투적 표현을 쓰기가 망설여지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작시자 존 뉴우튼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의 사전에는 절망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세상이 절망의 시대라고 말할지라도, 우리는 희망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진면목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오늘 이 시대의 상황과 흡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타락을 거듭하다 마침내 B.C. 586년 바벨론에게 패망합니다. 예레미야는 폐허가 된 조국 이스라엘과 수도 예루살렘을 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아름다웠던 시가지가 잿더미가 되고, 화려했던 성전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한 마디로 아비규환입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그 참상을 보고 눈물로 써내려간 비탄시입니다. 구구절절 비참한 상황이 그려져 있고, 선지자의 슬픔과 눈물이 배어 있습니다. “밤에는 슬피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애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흐름이여…”(애 1:16),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애 2:11~12) 선지자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 가운데 과연 희망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인간적으로 보면 완전한 절망 상태입니다. 그래서 19절~20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그는 쓰디쓴 고통으로 낙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참담한 현실 속에서 다시 희망을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비취는 한 줄기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희망의 빛’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신앙의 힘입니다. 우리도 예레미야가 보았던 그 희망의 빛을 보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금년 한 해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오히려 희망을 노래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절망을 시대를 살아가는 인생의 자산:희망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희망이 있는 한 인생은 불쌍하지 않습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죽고, 희망이 있는 사람은 삽니다. 절망은 인간을 죽이는 독약이고, 희망은 인간을 살리는 명약입니다.

어느 과학자가 흰쥐 실험을 했습니다. 두 개의 통에 흰쥐를 한 마리씩 가둬 놓았습니다. 하나는 뚜껑을 덮어 빛이 들어오지 않게 하고, 다른 하나는 약간 틈을 벌려 빛이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 결과 빛이 들어오지 않는 통의 쥐는 금세 죽고, 빛이 들어오는 통의 쥐는 오래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의 빛이 없으면 죽습니다.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인간을 가리켜 ‘희망의 존재(Homo Esperans)’라고 불렀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대 희망(Absolute Hope)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희망은 있다(Spero Spera)”는 말이 있는데, 그리스도인은 살아 있는 동안은 물론이고 죽어도 희망이 있습니다(잠 14:32). 죽어도 천국이기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한 어떤 경우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보았던 희망의 빛:하나님의 성실성

인간적으로 보면 당연히 예레미야는 절망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극한 고통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치던 그에게 절망에서 희망으로 대전환이 일어납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절망의 어둠을 뚫고 비춰오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비탄과 절망 중에 있는 백성들을 향해 희망을 노래합니다. 그는 ‘눈물의 선지자’를 넘어 이제 ‘희망의 선지자’로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막연히 바라보기만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묵상하고 그 사실을 꼭 붙들었습니다. 22절을 보면,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인자는 죄인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이고,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애절한 사랑입니다. 부모보다 더한 사랑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입니다(롬 8:32).

23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실이 크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하나님이 만일 변덕스러운 분이라면 불안해서 못 삽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 인자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로우며 하나님의 성실이 크다고 노래합니다.

언젠가 일출을 보려고 바다에 간 적 있었습니다. 계속 기다려도 해가 나타나지 않자 옆에 있던 사람이 말합니다. “에이~ 오늘 해가 안 뜨나 봐. 가자, 가!” 정말 해가 안 뜰까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을지라도 해는 매일 아침 떠오릅니다. 1년 365일 어김없이 떠오릅니다. 태양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성실성입니다. 우리가 의심과 불신앙의 구름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성실성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불안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성실성으로 우리의 일생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수없이 하나님을 배반했지만 하나님은 나를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예레미야가 보았던 그 희망을 빛을 보고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절망의 시대에 부르는 희망의 노래:말씀과 기도의 날갯짓

세상 사람들은 인간적인 의지로 희망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극한 상황이 되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인간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예전에 희망의 전도사로 불리던 분이 자살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밥은 굶어도 희망은 굶지 말자고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그러나 질병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해오자 절망한 나머지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적인 의지로 부르는 희망의 노래의 한계입니다.

결코 무너지지 않는 유일한 희망의 근거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24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새 힘을 얻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도 이사야 40장 31절에서 증거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신앙의 양 날개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이 두 가지로 날갯짓을 하며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말씀을 붙잡으면 영혼의 날갯짓을 하며 하나님께 더욱 높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희망이 넘치고 용기가 생기고 담대해집니다. 결국은 절망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21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두었더니 오히려 소망이 되었사옴은”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비로소 희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도하면 영혼의 날갯짓을 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희망이 넘치고 용기가 솟아납니다. 마침내 놀라운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레미야가 절망 가운데 갇혀 있을 때 받은 말씀이 예레미야 33장 3절 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미국의 유일한 4선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한창 정치인으로 성장하던 39세에 느닷없이 소아마비 장애를 얻게 됩니다. 하루아침에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그는 인생이 끝장난 줄 알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신실한 신앙의 아내의 격려 덕분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희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12년 후 당당히 대통령이 됩니다. 대통령 재임 시에도 어려운 상황이 계속됐지만 그는 희망을 노래함으로 승리합니다. 경제대공황 당시 뉴딜 정책으로 경제를 부흥시켰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연합군의 승전을 이끌었습니다. 그 비결은 절망의 상황에도 말씀과 기도로 새 힘을 얻으며 희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 일화는 유명합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아이젠하워 사령관의 총지휘하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전개합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볼 때 승산이 없었습니다. 그때 영국의 처칠 수상과 아이젠하워 사령관도 기도했지만 특히 루스벨트는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고 17시간이나 기도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습니다. 그는 말씀과 기도로 절망을 돌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새해가 밝았지만 세상을 바라보면 여전히 어둠이 역력합니다. 사방팔방 절망의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성실성을 믿으십시오. 예레미야가 절망의 시대에 보았던 그 희망의 빛을 보십시오. 그리고 희망을 노래하십시오. 신앙의 ‘되고 법칙’을 기억하십시오. 고난이 있으면 기도하면 되고, 두려우면 말씀 붙잡으면 되고, 실패했으면 다시 일어나면 되고, 세상이 절망하면 희망을 노래하면 됩니다. 그래서 부디 2016년 새해에는 어떤 상황이 닥쳐와도 반드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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