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개혁주의 윤리 - 참 성도의 마땅한 바 :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

하나님 자녀됨과 교회 지체됨은 다르지 않아…참 교회와 참 성도 함께 생각해야
참 성도는 구원을 고백하고 새 삶의 모범 보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자라가야


 
▲ 문병호 교수총신신대원·조직신학
1. 참 교회와 참 성도

하나님은 이 땅에 가시적(可視的)이고 유형적(有形的)인 교회를 두셔서 자신의 백성을 하나가 되게 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찬양과 영광을 받으신다. 지상(地上)의 교회는 천상(天上)의 교회를 바라보는 바, 그 본질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손에 잡히는 시설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온전한 신앙고백과 예배와 사역, 그리고 성도의 교제에 있다.

교회는 한 성령의 역사로 한 부르심 가운데 한 믿음을 지닌 한 몸, 곧 “그리스도의 몸”을 뜻한다(엡 1:23; 4:4~5, 12; 5:30). 교회에는 여러 지체(肢體)가 있으나 머리가 하나이므로 몸도 하나이다(고전 12:13, 20; 엡 4:15~16). 그리스도가 유일하신 “몸의 구주”가 되시기 때문이다(엡 5:23).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대속의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요 19:30)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셔서 보혜사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요 15:26; 행 2:33), 그 영을 받은 자마다 자신과 함께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이며 상속자의 자리에 서게 하셨다(막 14:36; 롬 8:15, 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됨과 교회의 지체됨이 서로 다르지 않다.

우리가 ‘참 교회’와 ‘참 성도’를 함께 생각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성도의 거룩함이 없이 교회의 거룩함이 있을 수 없고, 성도의 하나됨을 차치하고 교회의 유일성과 보편성을 논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는 ‘참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나 정작 ‘참 성도’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교회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에는 신속하나 정작 자신이 참 성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고 교회에 대한 편견(偏見)만 늘어놓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러나 성도의 어떠함을 문제 삼지 않고 교회의 어떠함을 거론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몸이며 성도들은 교회의 지체(肢體)이기 때문이다.
 
2. 참 교회의 표지

지상의 참 교회는 완전하지 않으나 필히 완전한 천상의 교회에 이른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의가 완전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교회가 참된 것은 그 지체들의 공로나 자질이 아니라 그가 베푸시는 은혜로 말미암는다. 참 교회의 세 가지 표지로 거론되는 “말씀의 순수한 선포” “성례의 합법적 거행” “권징의 합당한 시행”은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말씀의 순수한 선포’는 성령으로 영감(靈感)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조명(照明)으로 감화(感化)된 성도가 수납(受納)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말씀 가운데 친히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는 활력이 있다(히 4:12). 전함이 없이는 들을 수 없고, 들음이 없이는 믿을 수 없으며, 믿음이 없이는 영생에 이를 수 없으므로, 말씀을 전하지 않는 교회는 살아있는 주님의 몸 된 교회라고 할 수 없다(롬 10:14, 17).

‘성례의 합법적 거행’은 주님이 제정하신 말씀에 따라 세례와 성찬을 받음으로 성도가 거듭나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와 계속적으로 교제하고 교통하며 살아가는 은혜를 인친다. 이로써 성도는 거듭난 자녀로서 자녀답게 살아가는, ‘살아남’과 ‘살아감’의 이중적인 은혜를 새기게 된다. 성도는 지상의 생을 위하여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날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받아야 하듯이, 천상의 생인 영생을 위하여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 곧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요 6:55).

‘권징의 합당한 시행’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자 신부로서 거룩함을 유지하고 그에 걸맞은 역할을 다하는 자리에 서도록 단련(鍛鍊)시키는 치리(治理)의 장치가 된다. 권징은 단지 무너뜨리고 배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세우고 포용하기 위한 것이다(롬 14:19). 일시적으로 잘라내야 할 경우가 없지 않으나, 그 때에도 돌이켜 아물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이 땅의 성도는 거듭났으나 아직 완전하지는 않다. 사도 바울이 한탄했듯이, 여전히 “곤고한 사람”으로서(롬 7:24), 죄나 허물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내적 회개와 더불어 외적 권징은 성도의 삶에 있어서 치료하는 약(藥)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서 필수불가결하다. 말씀과 성례는 교회의 목과 심장과 같으나 권징은 그 자체로 생명의 기관이 되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권징이 없다면 면역이 전무(全無)한 말기의 환자와 같아서 작은 질병이나 바이러스에도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3. 참 성도의 됨됨이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참 교회의 어떠함은 참 성도의 어떠함을 불문(不問)하고 다룰 수 없다. 그리하여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참 교회의 표지를 다루기 전에 참 성도의 됨됨이를 먼저 논하는 바, “신앙의 고백” “삶의 모범” “성례의 참여”가 그 세 가지이다(4권 1장 7절).

‘신앙의 고백’은 성도가 성령의 감동에 따라 말씀에 기록된 구원의 진리를 믿음으로 수납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가 되며 우리는 단지 그것에 대하여 “아멘”하여 값없이 구원에 이르게 되었음을 시인하고 확신하는 것을 의미한다(고후 1:20).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에 대하여 전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으로서, 단지 내적인 정서를 토로하거나 로마 가톨릭이 강조하는 공적(公的)인 입술의 고백을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고백’은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내적 회심과 신분적 거듭남을 모두 아우르는 것으로서, 새 생명과 새 생활을 모두 그 대상으로 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이를 심중에 고백하는 믿음을 지니게 된다. 이는 성령의 내적 감화로 말미암는다. 이러한 고백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고자 하는 소명을 포함한다(고전 4:1). 성도는 먼저 자신이 말씀의 조명과 감화 가운데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충만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여야 한다. 무엇보다 지도자는 건전한 교리를 수납하여 고백하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바대로 심령에 새겨 전해야 한다. ‘불신이 섞인 확신’에는 그리스도의 전적인 공로를 믿는 믿음과 지식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

‘삶의 모범’도 성도에게 마땅히 요구된다. 믿음은 말씀에 대한 성령의 감화로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담고 있으며 사랑의 영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한다. 믿음은 우리 안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한다(갈 5:6). 신앙의 고백은 입술에 속한 것이 아니라 행위로 드러나는 전인(全人)적인 것이다. 그것은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열매를 맺는다(딤전 1:5). 이러한 두 번째 요소는 첫 번째 요소인 ‘신앙의 고백’과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를 향한 진정한 고백에는 그를 믿는 믿음 가운데 그를 본받아 사는 삶이 필히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성도는 생활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하며, 기도에 전념하고, 옳고 그름을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은 맡겨진 소명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의와 거룩의 완전한 기준을 하나님의 뜻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선하게 살아가는 삶의 지식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예배도 이로부터 말미암는다. 참 성도의 척도는 단지 내적 헤아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외적 순종에 달려있다.

‘성례의 참여’는 광의(廣義)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은 성례로써 인쳐진다. 세례는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시작의 표이며, 성찬은 그 계속의 표이다. 세례는 물로 씻음으로 그와 함께 죽고 살아나는 거듭남을, 성찬은 떡과 잔으로 그의 살과 피에 참여함을 드러낸다. 성례가 인치는 은혜는 새 생명과 새 생활을 모두 아우른다. 성례는 거듭남과 자라감을 인친다(롬 6:3~5; 고전 11:23~28).

주님은 성례를 통하여 말씀을 가르치시고, 우리 마음의 문을 여셔서, 그 교훈을 확증하신다. 성례에 참여함으로 제정된 말씀의 효력이 나타난다. 이것은 그 말씀을 듣기 때문이 아니라 믿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성례가 작용한다. 성례는 믿음을 지탱하고, 자라게 하고, 확증하고, 증진시킨다. 성례에 참여하는 것은 단지 성도의 어떠함을 드러내는 표지일 뿐만 아니라 성도가 마땅히 성도답게 자라가는 길이 된다. 성례는 수직적이며 수평적인 의의를 지닌다. 성례의 은혜는 위로부터 아래로 내린다. 그것은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를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심을 인친다. 또한 성례를 통하여 머리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은혜가 수평적으로 이웃에게 전달된다.

요약하면, 참 성도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말씀대로 구원을 받았음을 고백하고, 그 은혜를 좇아 새 생명 가운데 새 삶을 사는 모범을 보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함께 자라가야 한다. 이는 순서를 달리할 뿐, 교회의 세 가지 표지에 각각 상응한다.

4. 사랑: 자유자의 멍에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이러한 성도의 됨됨이를 판단하는 기준은 “사랑”이다. 성도의 섬김(디아코니아)에는 사랑(아가페)과 경건(유세베이아)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여하한 경우이든 그리스도를 본받아, 궁극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백성을 아시므로(딤후 2:19), 성도의 마땅한 바를 곡해하여 헛된 사변이나 관념에 빠지거나 타인을 자의(恣意)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별하여 그리스도를 좇아 그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열심을 가지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에 힘써야 한다(딤후 2:15).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거듭난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 속에 임하여(롬 8:9), 그 영의 증거로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생각하고 그 가르침대로 그의 일을 행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요 14:12, 17, 26; 15:26; 16:13~16).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로서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는 자리에 선다(롬 8:17; 엡 3:6; 요 17:22, 24). 주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죄에 대해서는 자유하나 의에 매이는 의의 종이 된다(롬 6:15~23). 주 안에서 자유하게 된 자는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종노릇한다(갈 5:13~14).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주님께 다 맡기고 진정한 쉼을 누리는 자는 스스로 자유로운 자가 아니라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는 자이다(마 11:28~30). 오직 이러한 해방과 쉼이 있는 자만이 진정한 사랑의 멍에를 메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을 살게 된다(마 16:24).

율법은 본질상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으로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신령하다(롬 7:12, 14). 율법 자체가 저주가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율법이 저주의 기능을 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로 거듭난 성도는 이제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되어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리에 서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약 1:25). 이를 위하여 주님이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롬 10:4). 이는 율법을 폐지하심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심을 뜻한다(마 5:17). 주님은 우리의 죄값을 남김없이 치르시고 우리의 거룩을 위하여 모든 율법에 순종하셨다. 그리하여 다 이루신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요 19:30; 고후 5:21).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4:11).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함에 대한 최고의 표지가 된다(요일 4:16). 우리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되, 주 안에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신 주님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웃은 물론 원수도 사랑할 수 있다(마 5:44). 주님의 공로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진정한 능력이다.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다. 주님의 멍에는 독수리의 날개와 같아, 그것을 메는 자만이 높이, 멀리 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학교에서 배우자(Discamus in schola Christi)!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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