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특집] 옥수중앙교회 ‘5만원의 사랑나누기’ 동행취재

주민센터 추천 받은 불신자 장애인 가정 20곳에 매달 생필품 직접 전달
“꼬박 하루 힘들어도 도리어 새힘…성탄절엔 300가정 가래떡 전할 것”


금호역 3번 출구에서 옥수중앙교회(호용한 목사)로 오르는 언덕길은 길 옆 이십여 층은 족히 되는 높다란 아파트 단지에 잔뜩 주눅 들어 있었다. 소형차 한 대 지나기에 벅차 보이는 좁은 길에는 전날 내린 눈이 녹다만 모습으로 질척거렸다. 그 언덕길 위로 십자가가 보였다.

“골목길 하나 사이로 이쪽은 금호동, 저쪽은 옥수동이에요.”

호용한 목사가 사방이 내려다뵈는 교회 마당에서 달동네로 유명했던 옥수동과 금호동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은 달동네라 하기에 무색하리만큼 고층 아파트 단지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달동네를 오르듯 삶이 고단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도 했다. 옥수중앙교회가 매달 5만원어치 생필품을 사서 건네는 20가정은 그중에서도 가장 낮고 감추어진 사람들이다.

“주민센터에 거동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이 있는 불신자 가정을 추천해달라고 했어요. 매달 꼬박꼬박 찾아간 지가 벌써 2년이 됐네요.”

교역자들과 함께 미리 대형할인매장을 다녀온 호 목사는 교회에서 기다리고 있던 교인 몇 명과 승합차 두 대에 나누어 탔다. 이날 준비한 생필품은 두루마리 화장지와 락스, 먹을거리로 사과 한 봉지와 파인애플, 유자차였다. 열흘 전에 20가정에 물건을 전달한 터라 이날은 일곱 가정만 방문하기로 했지만, 승합차 한 대가 가득 찰 만큼 사온 물건들은 양이 많았다.

옥수중앙교회가 준비하는 생필품은 수십 종에 이른다. 칫솔, 치약, 세제 등 욕실용품부터 제철 과일과 생선에, 명절이 끼인 달에는 고기도 빼놓지 않는다. 매달 어떤 물건을 구입했는지 기록해 놓기 때문에 이때쯤 이것이 떨어졌겠다 짐작이 되고, 거기에 맞게 물건을 전달하니 받는 이들로서는 여간 요긴한 것이 아니다.

앞자리에 탄 호 목사가 빨갛게 익어 먹음직스런 사과 봉지를 가리켰다. “이렇게 보기 좋은 사과를 선뜻 살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몇 퍼센트나 되겠어요? 나만 해도 망설이게 되는데….”

중학교 3년은 신문배달로, 고등학교 3년은 과외선생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더니, 머리로 아는 가난이 아니라 몸으로 아는 가난이고 애틋함이다. 하나라도 더 좋은 것을 주고픈 호 목사의 마음은 며칠 동안 사람들에게 맛있는 행복으로 전해질 터였다.

가는 집들이 교회 주변이라더니, 출발한 지 5분이 못 돼 금남시장 근처에서 차가 멈췄다. 금남시장은 옥수중앙교회가 있는 언덕배기와 함께 옥수동과 금호동에서 재개발이 피해간 몇 남지 않은 곳 중 하나다. 동행한 교인들은 몇 번씩 다녀본 이들답게 차에서 능숙하게 물건을 꺼내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 못 들어가는 좁은 골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어느새 다른 골목이 나왔고,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니 윤영분(75세) 할머니가 살고 있다는 반지하 다세대주택이 나왔다.

“이렇게 못난 사람을 찾아주니 감사해요.”

윤 할머니는 25년을 꼬박 누워 살았다. 병원에서 다리 치료를 받다 실수로 목 신경을 다쳐 하반신을 못 쓰게 됐다. 누워서 식사를 하고, 용변을 처리해야 했다. 남편은 누워 있는 윤 할머니를 남겨두고 오래 전 집을 나갔고, 윤 할머니는 자연스레 피붙이 딸의 몫이 됐다. 딸은 선천적으로 왜소증이었다. 아들도 둘이 있지만 역시 왜소증으로 이렇다 할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다. 때문에 딸은 수십 년을 작은 반지하 집에서 거동 못하는 어머니와, 거동 안 하는 두 오빠를 먹이고 챙기며 살았다.

“우리 딸이 착해요. 내가 울면 ‘왜 울어, 엄마보다 더 불쌍한 사람도 있어’ 그래요.”

“한강물이 다 내 눈물”이라고 할 만큼 눈물이 메마를 날이 없었지만, 딸이 있어 윤 할머니는 눈물 속에서도 꾸역꾸역 견뎌올 수 있었다.

호 목사가 언제나처럼 윤 할머니의 손을 잡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호 목사의 기도에 물기가 서렸다. 윤 할머니의 눈물처럼 호 목사의 눈물도 반복되는 일상이다.

“물건도 고맙지만 나는 사람이 더 귀해요. 안 오시면 걱정되고 그래요.” 다시 찾아와 달라는 윤 할머니의 신신당부에 호 목사는 꼭 그러겠다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명자(61세) 씨는 옥수중앙교회 근처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 안쪽에서 박명자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보다 앞서 훅 역한 냄새가 날아왔다. 박명자 씨 역시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데, 설상가상으로 요즘은 당뇨합병증으로 발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남편은 3년 전에 죽고 삼십 대 아들 둘과 살고 있는데, 그나마 둘째 아들은 몇 년 전에 머리와 다리를 다쳐 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 혜택을 못 받는 상황에서, 첫째 아들의 벌이 또한 넉넉하지 못해 박명자 씨는 발이 썩어가는 데도 제대로 치료를 못 받았다.

“옥수동에 30년을 살다 아파트에는 2년 전에 입주했어요. 임대보증금이 7100만원인데, 그 돈이 없어 2100만원은 대출을 받았어요.”

소원이 뭘까 궁금해 물으니, “빨리 나아서 걷고 싶고, 그래서 아이들 밥이라도 해주면 좋겠어요”라는 대답이었다. 그러고 보니 침대 앞 탁자 위에 밥과 반찬이 든 플라스틱 통들이 보였다. 오늘 아침에도 박명자 씨는 자기 대신 밥을 짓고, 점심밥까지 준비하는 아들이 아프도록 눈에 밟혔을 것이다. 자기가 아무리 아프고 불편해도 어머니는 자식이 먼저다. 아들 걱정에 호 목사가 기도하는 내내 박명자 씨는 울음을 그치질 못했다.

원인모를 병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건장한 체격의 40대 나 씨, 정신질환을 앓는 아들 둘과 함께 살다 며칠 전 아들 하나를 여읜 70대 유 씨 할아버지, 처녀 때 척추를 다쳐 누워 지내는 40대 황 씨…. 찾아간 집들마다 사연 없는 집이 없었고, 눈물 없는 집이 없었다. 세상은 하루하루 화려해지고 높아져가지만, 가난한 이들의 세상은 하루하루 움츠러들고 있었다.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기도하고, 그렇게 쉴 새 없이 일곱 집을 돌고 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스무 집을 돌고나면 거의 하루가 지나요. 힘이 들 것도 같지만 도리어 새 힘을 얻어요. 감사할 따름이죠.”

호 목사가 김치찌개로 늦은 점심을 하며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 호 목사는 교역자들과 7000원이 넘는 밥은 사먹지 말자고 다짐한 이야기며, 교회에 관리집사를 두지 않는 이유며, 그동안 옥수중앙교회가 어떻게 교회 경비를 줄여가며 이웃들을 섬겨왔는지를 두런두런 들려줬다.

“한국교회가 너무 사치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요.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잖아요. 교회가 쓸 것 다 쓰고 먹을 거 다 먹으면서 이웃을 섬길 수 있겠어요?”

호 목사는 이번 성탄절에는 쌀 열 가마로 가래떡을 만들어 300가정에 나눠줄 예정이라고 했다. 하얗고 먹음직스런 가래떡으로 옥수동과 금호동, 이제는 달동네가 아니지만 여전히 달동네 주민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이웃들은 행복하고 배부를 터였다.

금호역으로 내려가는 달동네 언덕길은 여전히 아파트에 가려져 그늘져 있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성탄절을 살아가는 옥수중앙교회로 인해 언덕길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지하철역 앞 상가에서 성탄 캐럴이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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