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문

상단여백
HOME 기획/해설 성탄특집
[성탄설교] 평화를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베소서 2장 11~19절)남창우 목사(장충교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화평입니다
아기 예수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우리, 세상과 평화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인류 최대 명절인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우리 생애 가장 기쁘고 즐겁고 감사해야 할 날입니다.
그러나 알버트 까뮈는 우리 시대를 ‘공공연한 근심의 시대’라고 불렀습니다. “근심은 우리 시대의 공식 감정이며, 근심은 우리 시대의 모든 노이로제의 근원이며, 근심은 우리 시대의 가장 만연한 심리학적 화두다.” 마크 트웨인은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은 오직 한 가지, 마음의 평화를 보장하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을 하고, 평화를 위하여 관계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바로 이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땅 위의 평화”에 대해서 말하고 노래하고 꿈을 꿉니다. 하지만 근심의 시대 가운데 살면서 우리는 어떻게 평화를 꿈꾸며 그 꿈을 이뤄갈 수 있습니까요? 정말 이 성탄이 우리의 평화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몰라도 우리만은 꼭 알아야할 진리의 국면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가져다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을 앞둔 어느 해에 임종을 앞둔 어떤 형제에게 심방을 가서 “하나님과 평화하십니까?”라고 했더니 그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아직까지 한 번도 하나님과 말다툼해 본 일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우리가 그 분을 믿기 전,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원수지간이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이 땅이 왜 이렇게 고통스럽고 불행합니까?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없는 이방사람들이었습니다. 언약 밖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그래서 불행하고 고통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주장에 대해 항변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소망이 없단 말이냐? 그렇다면 성실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다 뭐냐?”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너희 기독교인들에 대해 가장 마음이 좁고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아니냐?” 이런 주장에 대해 우리는 어떤 답변을 해야 합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마음이 좁고,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사랑 넘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의사가 검사를 하다가 그 환자가 당뇨환자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래서 인슐린 주사를 처방합니다. 하지만 그 환자는 이렇게 외칩니다. “인슐린 주사라고요? 난 인슐린 주사를 맞고 싶지 않습니다.” 의사는 반드시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그 환자는 “하지만 난 인슐린 주사를 맞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약을 쓰면 안 되겠습니까? 페니실린은 어떻습니까? 아스피린을 두 배로 먹으면 안 될까요?” 그래도 의사는 인슐린이 없으면 그가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여 말합니다. 그러자 환자는 화가 난 얼굴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봐요. 의사선생! 난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내가 만난 의사가운데 가장 마음이 좁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과연 이 의사가 융통성 없는 사람입니까? 그가 환자에게 진실, 즉 그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 그를 정말 사랑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마음이 좁거나 독선적이거나 완고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에 대해 진리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예수님을 만나기 전, 우리에겐 언약도 없고 소망도 없고 오히려 하나님과 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정욕의 더러움을, 부끄러운 욕심을, 상실한 마음을 내버려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든 우리와 세상이 그런 모양으로 변질이 되고 타락을 하니 진노를 푸실 수가 없었기에, 그 진노가운데서 우리는 고통스럽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진 것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 우리 주님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늘의 천군천사들은 무엇이라고 찬송을 불렀습니까? 누가복음 2장 14절에 보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해결책입니다. 이 성탄절에 오신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을 가져다줍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우리는 결코 마음이 좁거나 완고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은 평화의 날입니다. 왜냐하면 성탄절의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을 가져다 준 날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탄생이 평화인 이유는 너와 나 사이에 화평을 가져다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역사가 기록된 기간 중 8%만이 평화로운 시기였다고 합니다.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한 지난 3000년 역사 가운데서 오직 300년만이 평화로운 시기였고, 8000개의 조약들이 파기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아직 준전시체제 하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평화가 현실이며, 실재입니다. 혹시 이런 경험을 해 보십니까? 내게 불편을 주고 고통을 주는 그런 사람 있을 때, 그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하신 일을 생각하고,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을 생각하고, 그 분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이전에는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평화를 깊이 있게 경험하게 됩니다.

1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이어 15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18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만약 이 땅에서 많이 배운 사람들과 적게 배운 사람들이 평화하며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 곳은 교회여야 합니다. 만약 이 땅에서 많이 가진 사람들과 많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평화하며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 곳은 교회여야 합니다. 만약 이 땅에서 나이 어린 사람들과 나이 많은 사람들이 평화하며 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 곳은 교회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만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 나와 나 외에 다른 모든 사람들 사이에 평화의 가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평화할 수 있습니다. 내게 손해를 끼치고 나를 고통스럽게 한 원수라 할지라도 내 속에 하나님이 주신 평화가 퍼 부어지고 있는 한 평화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 임하신 그 하나님의 평화는 이 세상 그 어떤 갈등과 고통과 어둠보다도 더 밝고, 더 크고, 더 영광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서로 평화가 없다면 예수님이 세상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세상이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그런 평화가 없지만 교회에는 그런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적당한 평화가 아니라 완전한 평화, 위장된 평화가 아니라 진정한 평화, 그런 평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젊은이가 어느 유복한 집의 관리인으로 고용되었습니다. 그 집에는 두 명의 10대 소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 불쌍한 관리인을 골려 주는 것을 그들의 임무로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그의 신발을 마루에 못 박아 고정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는 미소를 지으며 못을 뽑아냈습니다. 또 하루는 문 위에 물이 든 양동이를 올려놓아 관리인의 옷이 물에 흠뻑 젖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물을 닦아 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소년들에게 존경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의연한 모습 때문에 너무나 죄책감을 느끼게 된 소년들은 어느 날 그에게 찾아와 다시는 그런 장난을 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오 좋아! 그럼 나도 너희들의 수프에 침을 뱉지 않도록 하지”

우리가 사는 모습이 때로 이와 같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안 그런 체 하고 살아가지만 뒤에서는 수프에 침을 뱉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다른 사람들을 뒤에서 헐뜯으며 복수할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성탄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땅 위에 평화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해진 메시지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도 화목하게 지내게 돼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나와 나 사이에도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 우리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구원을 주시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분이 이 성탄절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조건 달지 않으셨습니다. 허물 찾지 않으셨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우리 있는 이 모습 그대로 품어주시고 안아주신 분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이 사랑한 나도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와 평화하십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용서하고 사랑한 나를 내가 용서하고 사랑했느냐는 말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나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받지 못한 마음, 용서받지 못한 마음이 어떻게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시기와 질투, 열등감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나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는 그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못 만난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내게 와 나를 만져주셨을 때 나의 마음은 당신의 평안으로 바뀌어 집니다.”

여러분! 이번 크리스마스에 오신 그 예수님을 뜨겁게 환영하고 그리고 진심으로 우리 마음에 영접하십시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남창우 목사  ekd@kidok.com

<저작권자 © 기독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남창우 목사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