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과 조선인은 같은 배를 탔다. 항구에 도착하는 것도 함께! 조난할지라도 함께! 이것이 운명이다.”라는 이 말은 황기 2600년 그러니까 1940년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내용이다. 이는 조선인의 마음과 몸에 일본인과 동질의 뿌리를 내리게 해야 한다는 일제의 속셈이었다. 1940년 <모던일본>이라는 잡지는 조선판 간행을 기념해 미스조선 선발을 발표한다. 당시 이 심사는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심사위원들에 의하여 미스조선이 결정되었는데 이 대회에는 조선과 일본에서 응모가 폭주했다고 한다. 당시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 미나미 총독은 내선일체라는 명목으로 조선인에 대한 일본화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전시체제라는 강압성과 피폐함이 가득한 당시 미녀 선발은 뜬금없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시국과는 무관한 일제의 상업주의가 연출한 하나의 이벤트였다.

당시 일제는 내선일체를 위해 진행되고 있는 지원병 제도와 창씨개명을 선전하면서 2000만 조선인들이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약진하고 있다고 선전했다. 바로 이런 분위기를 축하하기 위한 행사가 바로 미스조선 선발대회였다. 미스조선 심사평에는 식민지 조선을 상징하는 연약하고 어여쁜 여성과 그들의 미모를 소비하는 일본남성의 관계가 담겨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시 미스조선에 뽑힌 여성이 박은실이었다. 저들은 미스조선 박은실에 대하여 청초한 아름다움 조선의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평했다. 조선인을 동화시키고 그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많은 미사여구를 동원했지만 이러한 배후에는 여전히 조선은 보호의 대상이자 지배의 대상이라는 관념이 깔려 있었다.

미스조선 박은실은 당시 평양 모란대의 오마키차야에 살고 있었다. 오마키차야는 일본문화계 명사들이 찾는 평양 제일의 요릿집이었다. 본래 오마키차야는 여자가 운영하는 작은 찻집이었다. 그러던 것이 일본작가 다카하마교시가 쓴 “조선”이라는 소설에 등장하면서 유명해진 곳이었다. 당시 일제는 지배는 하되 어떤 의미에서 무관심했던 조선에 대해 일본인의 관심을 촉구하는 동시에 그들의 호의를 드러내 저들이 멸시하는 반도인들에 대한 이미지 개선책으로 대중문화계 행사인 미스조선 선발대회라는 미녀 선발대회를 기획한 것이었다. 그러나 저들의 시선은 여전히 조선을 멸시하는 제국의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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