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기 목사(늘사랑교회)

“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김 훈 <칼의 노래>에서)

이 책은 임진왜란 때 위기의 나라를 건졌던 이순신 장군의 생애를 그린 소설이다. 그리고 이 표현은 끼니가 돌아오는데도 병사들을 먹일 것이 없어 한탄하는 이 순신 장군의 막막한 심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탄식이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기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소리를 들으면 먹을 것이 없어 가슴을 태우는 사람의 아픔이 몸으로 느껴온다. 이미 먹은 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고 무수한 끼니들이 다가오는 데 아무런 대책이 없다. 얼마나 실감나는 표현인가!

한편 이건 신자들에겐 하나님의 소리이다. 이전에 받았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은혜들이 오늘 하루 영혼의 굶주림을 채우지 못한다는 말로 들린다. 과거에 묻혀 자족하고 살아가던 내 영혼을 깨워준다. 하나님의 은혜는 과거의 것만으로 살아갈 수 없고, 오늘 현재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러티브는 자기의 주장을 서술하지 않는다. 논리를 전개하면서 설명하지 않는다. 내러티브는 청중으로 하여금 상상하게 하고, 그 사건을 보게 한다. 그리고 그 사건을 봄으로 느끼게 한다. 설교를 하면서 내러티브가 갖는 특징을 꼽자면 이야기는 청중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그들이 설교에 참여하도록 자극하는 수사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먼저 인지해야 한다. 공동체는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하며, 이야기는 개방적이어서 청중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해당하는 의미를 발견한다.

그렇다면 성경 안에서 내러티브는 어떻게 말하는가. 룻기를 보면 나오미가 모합에 내려가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단지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이 죽은 이야기뿐이다. 그리고 마지막 두 며느리들과 이별 장면으로부터 룻기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한 며느리는 모합 땅에 머물겠다고 집으로 돌아가고, 유독 룻만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고집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시어머니는 룻에게 있어서 아무런 희망이 없다. 돈도 없고, 자식을 낳아줄 수도 없고, 그리고도 룻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줄 아무런 능력도 없다. 그런데 시어머니를 따라 가겠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큰 며느리가 고향에 남겠다고 말하는 말 속에, 그리고 룻이 시모를 따라 가겠다고 주장하는 말 속에 나오미가 과거에 모합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옛 이야기가 살포시 숨겨 있다. 룻이 시모를 따라 가겠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이 어떻게 복음을 사마리아와 소아시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했는가를 기록한 책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성령께서 어떻게 그들을 사용하여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가를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은 선교 역사를 기록한 책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이야기를 기록한 정말 멋진 내러티브로 가득찬 책이다. 성경의 새로운 발견은 곧 성경 안에 있는 내러티브의 발견이다.

60년대 중반부터 설교의 위기론이 제기되었고, 이 위기의 극복 노력으로 쌍방 커뮤니케이션(Two way communication)을 강조하는 설교학이 등장하였다. 쌍방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해서 반드시 대화적 스타일(dialogical style)이 되어야 한다기 보다는 비록 일방적(monologue) 스타일의 설교일망정 그 가운데 대화적 원리가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새로운 시도는 귀납법적 설교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성경 안에 내러티브가 발견되면서 이야기식 설교로 발전되기 시작했다.

설교에서 지성뿐만 아니라 이제는 감성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설교의 언어에 내포된 시적이고 은유적인 측면이 부각되고, 설교에서의 상상의 역할이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 이와 함께 설교는 논리적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의 변화를 궁극적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단순한 연설자(speaker)가 아니라, 연기자(performer, artist)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이야기 설교는 제목 설교를 거부하고 성경본문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므로, 설교의 다양한 형태를 제공해 주었다. 설교의 내용은 본문이 결정한다. 이야기 설교는 단순히 하나의 설교형식이 아니라, 이야기의 내용과 전달을 동시에 강조하는 설교 형태이다.

이야기 설교의 이런 점을 고려하여 강단에 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설교의 패러다임 전환을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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