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개혁주의 교육 ② 말씀대로 믿고 행하는 교회

교회는 참된 신자들의 모임…사도적 가르침에 충실하며 서로 사랑으로 연합해야
교회 사명은 믿음대로 행하는 것…늘 깨어서 끊임없이 개혁해야 함을 잊지 말자


 

▲ 민찬기 목사예수인교회

현재 교회의 현실은 잘못된 교회관의 영향으로 주의 말씀에서 벗어난 채, 방향과 목적을 잃고 달려가고 있는 비성경적인 연합운동과 극심한 교회분열로 인한 개교회주의화로 고통하고 있다. 개교회주의 경향은 교단 정치의 불신과 교회간 경쟁적인 교세 확장으로 이어져 교회 분열을 야기시키고 있다. 사사 시대의 혼동처럼 자기 생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므로 교회설립에서부터 자본주의 체제의 기업 생리를 닮아있다.

이로 인해 오늘날 교회 안에는 물량주의가 팽배하여 그에 따른 세속화가 심각하다. 또한 권위를 중시하며 인본주의, 성직자의 사제주의적인 경향이 짙어지는 등 우리가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시급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종교개혁이 다시 일어나야 된다는 각성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다.
교회의 본질보다 기능에 더 치중하여 교회의 사명만을 외치는 행동파 신학이 목소리를 높이거나, 반대로 본질론에만 매달린 생명 없는 교회가 출현하고 있다. 우리의 과제는 이 둘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균형을 이룰 수 있느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두 가지 부분에 집중된다. 첫째, ‘교회란 무엇인가?’, 즉 교회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부분이다. 둘째,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즉 교회의 사명에 대한 부분이다.

교회의 기원과 의미

‘교회’라는 용어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이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세워진 언약 관계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카할’에서 온 것으로, 하나님에 의해 구원으로 부름 받은 자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처음으로 이 단어를 하나님의 참 백성을 가리키는 공동체에 적용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마 16:18, 18:17)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 참되고 본래적인 카할을 다시 세우기 위하여 오셨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이 공동체는 원리적으로는 유대 공동체와는 구별된 독자적이고 고유한 모임으로 참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로 활동하게 된다. 처음에 이 ‘교회’는 단지 예루살렘에만 있었으나, 그 후 사마리아와 안디옥에서, 그리고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 가운데 생겨났다.

‘교회’라는 단어는 공동체의 모임, 회집과 연관되지만(행 5:11, 11:26; 고전 11:18, 14:19, 28, 35) 특정한 지역의 개인의 집에서 모이는 일부 신자들에 대해 사용될 때 더 좁은 의미가 있다. 그래서 교회가 어느 정도 확장되었을 때 그들은 여러 집들에서 회집해야 했고, 일종의 가정 교회를 형성했다. 이것은 교회가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이게 된 예루살렘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가정 교회들은 각각 하나의 ‘교회’로 불렸지만, 그 지역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였고, ‘그리스도의 몸’, ‘신부’, ‘충만’으로 묘사됐다.

모든 공동체의 이런 통일성은 고백서와 교회법과 교회적 연합에 의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또한 교회는 먼저 교회 외부에서 믿음으로 들어오고, 그 뒤에 연합된 사람들의 협회가 아니다. 교회는 부분보다 전체가 우선하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의 본질은 전체뿐만 아니라, 특히 각 부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 백성은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께 돌아온 사람들로 구성되며, 제자들, 형제들, 택함 받은 자들, 부름 받은 자들, 성도들, 신자들로도 불렸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모임이다. 단지 지상의 모임만이 아니라 하늘의 모임도 포함한다. 또한 과거와 현재의 모임만이 아니라, 미래의 모임도 포함한다. 그렇다면 이제 이러한 의미를 가진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첫째,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은 말씀대로 믿는 것이다.

교회라고 번역된 구약과 신약의 단어에서처럼 ‘카할’, ‘에클레시아’라는 명칭은 ‘소집하다’를 의미하는 동사들의 파생어다. 특히 정치적, 종교적 목적으로 회집하는 사람들의 모임 또는 그런 목적으로 상호 연합된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아 모인 백성이었다.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 택한 족속, 왕 같은 제사장인 그리스도의 교회에 의해 대체되었다.

결국 교회는 선택이 실현된 것으로, 교회에 주어진 복들은 일차적으로 내적이고 영적인 속성을 지닌 소명과 중생, 믿음과 칭의, 성화와 영화이다. 이 복들이 하늘나라의 소유물들이고, 은혜 언약의 유익들이자,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에 대한 약속들이다. 이에 근거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부, 그리스도가 자신의 양떼를 치기 위한 울타리, 그리스도의 모퉁잇돌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지어진 하나님의 건물이자 성전이다.

그리고 교회의 회원들은 포도나무 가지, 살아 있는 돌들, 택함 받은 자들, 부름 받은 자들, 신자들, 사랑 받는 자들, 형제들과 자매들, 하나님의 자녀들 등으로 불린다. 이 모든 것은 교회가 그 본질상 ‘참된 신자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넓은 의미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 또는 장차 구원받게 될 모든 사람을 포함하기 때문에 참 믿음이 없는 자들은 외적으로 교회에 속할 수는 있지만 교회의 본질과 형태에서는 제외될 수 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있으나,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심중에 있는 ‘보이지 않는 교회’이지만, 반드시 이 땅 위에서 ‘보이는 교회’의 형태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 눈에 보이는 교회는 지상의 모든 교회라 할 수 있는 1세기부터 재림 때까지의 모든 교회를 다 일컬을 수도 있고, 각 시대의 구체적인 교회 전체를 말하거나, 나라별로 구성된 구체적인 교회, 혹은 한 지역의 교회들을 뜻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교회들은 오직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교회가 마땅히 드러내어야 할 다음의 특성들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첫째, 모든 참된 교회는 하나의 교회이다. 이것을 ‘교회의 통일성’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교회는 사도적 가르침에 충실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참된 하나의 교회에 속해 있기 위해서는 각각의 교회가 사도적 가르침에 충실하며,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이다.

둘째, 교회는 거룩한 교회이다. 이렇게 하나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의로 말미암아 따로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교회이다. 그렇다면 어떤 교회가 거룩한 교회인가? 바로 사도적 가르침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잘 받아 그 진리에 대해 적극적인 수호와 변증과 선포하는 교회가 거룩한 교회이다. 또한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 교회의 각 지체들이 성숙하고 성화를 온전히 이루어 나가는 교회가 거룩한 교회이다.

셋째, 교회는 보편적인 공교회이다. 이를 ‘교회의 보편성’이라고 하는데, 교회는 이 세상의 인종, 성별, 지위, 교육 정도 등등의 모든 차이를 넘어서는 공동체이다. 이 모든 차별을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한 공동체는 그런 공동체의 모습 그대로 이 세상의 빛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교회의 지체가 되도록 하는 ‘선교적인 교회’를 지향해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4문은 “거룩한 공교회에 대하여 당신이 믿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이렇다. “나는 세상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온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그의 성령과 말씀을 통해서, 참된 신앙의 연합 가운데 있는 선택된 공동체를 당신을 위하여 영생을 하도록 모으시고, 보호하시며, 보존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헤르만 바빙크는 신앙과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한 이후에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해 성령이 왔다. 하나님은 단지 성경만 준 것이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교회를 세우고 보존한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을 신앙, 즉 우리의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고, 보존해 나가야 한다.

둘째, 교회의 사명은 믿음대로 행하는 것이다.

모든 구원과 복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타락한 인간에게 흐른다. 그 모든 유익을 지닌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소유한 사람들의 교제는 ‘교회’라는 이름을 지닌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가 가져오신 구원과 영원한 부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키우며 목적지까지 전진시키려면 무지하고 태만한 우리들에게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약점에 대비해서 복음 전파가 활발하게 전개되도록 이 보물을 ‘교회’에 맡기셨다. 목사와 교사들을 임명하셔서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가르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권위를 주셨고,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질서를 위해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교회가 없다.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회를 모으신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교훈 위에 교회는 세워졌고, 말씀을 통해서 중생케 하시며, 신앙을 일으키시며, 교회를 정결케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다. 그래서 칼빈은 말씀을 교회의 영혼이라고 말한다. 근본적으로 교회의 모든 봉사는 말씀의 봉사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의 표지 속에 다른 것, 즉 성례의 순수한 시행과 성경적인 권징의 시행의 시행이다. 바빙크는 “말씀의 순수한 봉사는 교회 권징의 적용을 포함한다”고 했다. 이러한 참된 교회의 표지는 교회의 사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참된 교회의 표지가 무엇인가?

첫째는 말씀의 참된 전파이다. 말씀의 참된 전파는 교회의 존립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표지이다. 어떤 교회가 거짓교회가 되는 경우는 신앙의 기본적인 조항들을 공개적으로 부인하거나, 교리와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 아래 두지 아니할 때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의 교회들은 항상 진리에 머물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진력해야 한다.

둘째로 성례의 정당한 거행이다. 성례는 말씀의 유형적인 전파이다. 성례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 내용을 얻어서 합법적인 사역자에 의해 하나님의 정하신 제도를 따라 신자와 그 자녀들에게만 거행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성례에 참가한 우리는 그것이 신앙을 자라게 하며 강화하는 데 매우 유익한 보조수단임을 체험하게 된다.

셋째는 권징의 신실한 시행이다. 신실한 권징은 교리의 순수성 유지와 더불어 성례의 거룩을 유지하게 하는 데에 있어서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한 가지는 신실한 권징의 부재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불의한 일들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권징을 실시하지 못하는 사례들이 교회 안에서 허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실한 권징의 회복이 시행되는 일은 시급한 일이다. 이를 위해 우선 말씀의 권세가 회복되어야 하고, 말씀의 수종자들의 영적 권위가 회복되어야 한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의 이같은 신앙적 모토는 주의를 끌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멋진 문구가 아니다.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도록 하기 위해서 종교개혁자들이 목숨 걸고 싸웠던 것이다. 이러한 모토 위에 개혁교회가 세워져있다. 지상에 있는 교회는 자기와 같이 불완전한 성도들로 이루어진 미완성의 혼합이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 안에서 온전해져 가는 것이다.

결국 그 불완전한 교회를 통해 이루실 재창조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성도는 하늘의 기쁨으로 살아간다. 일찍이 칼빈은 어린 시절 그의 할머니로부터 인사하며 건넨 말 가운데 “오늘도 할머니에게 행운이 있기를...” 이란 말을 했다가 크게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행운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의 그늘 아래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속적 가치관에 함몰되어 자칫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세속화와 미신 그리고 알 수 없는 우상들에게 굴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깨어서 우리가 처한 교회의 현 주소를 바로 직시하고 나아가 우리는 끊임없는 개혁의 대상이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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