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개혁주의 설교 ⑨위대한 설교가 박형룡 박사

가정예배부터 말씀 권위 깊이 드러내…오랜 묵상과 준비끝에 친필 설교문 작성
“삶 통해 설교하고 감동 줘야 설교자 존경, 교인의 개혁신앙 헌신 결단 이끌어”


 

▲ 홍정이 목사(증경총회장·안디옥교회 원로)

필자는 신학교에서 박형룡 박사님으로부터 깊은 학문의 가르침과 또 설교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으며, 그분의 조직신학 책 원고 정리를 위해 박 박사님 댁에서 함께 지내면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날마다의 삶을 보면서 더욱 많은 것을 배우며 감동을 받았다. 그리하여 박 박사님 댁에서 3년여를 지낼 수 있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큰 복으로 알고 있다.

금번 이 지면을 통해 위대한 신학자요 설교가이신 박 박사님의 실제 삶을 소개함으로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1. 설교가 박형룡 박사의 가정예배 설교

박 박사님은 바쁜 생활중에도 가정예배를 귀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가정예배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고 생각한다.

박 박사님 댁 가정예배는 평일에는 매일 저녁 식사 후 8시경에 한 번 드렸고, 방학 때는 오전 11시경, 저녁 8시경 두 번 드렸다. 가정예배 사회는 박순도 사모님께서 하셨는데 찬송은 꼭 10장씩 불렀다. 처음에는 무릎을 꿇고 찬송 10장씩 부르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사모님께서 찬송을 택하라고 하실 때는 간단한 찬송 (구 405장, 204장, 426장 등)을 택했다. 그러나 가정예배에 익숙해지면서 찬송 10장 부르는 시간은 아주 빨리 지나갔다. 찬송 후 박 박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셨는데 비교적 간단히 전하셨지만 의미는 매우 깊었다.

박 박사님은 가정예배 때 천천히 말씀하셨지만 한 말씀 한 말씀이 권위 있는 말씀이셨고 감동을 주는 말씀이셨다. 박 박사님의 설교가 끝난 후에는 식구들이 함께 통성으로 기도했는데 특히 둘째 아들 모세씨의 쾌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한 후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쳤다. 지금도 내 눈앞에는 박 박사님께서 찬송을 열심히 부르시고 말씀을 전하셨던 모습이 아른거린다.

그런데 사모님께서 보실 때 박 박사님께서 가정예배 설교 준비가 좀 부족했다고 생각될 때는 설교 후에 질문을 하셨다. 그럼 이런 일이 있은 후에는 가정 예배 전 10~15분 정도 책상 앞에 앉으셔서 말씀을 준비하시고 전하셨다. 박 박사님은 참으로 겸손하시고 존경받으실 만한 어른이셨다.
 
2. 설교가 박형룡 박사의 가정생활

박 박사님은 규칙적인 생활을 하셨다. 오전 6시쯤 일어나시어 책상 앞에 앉아 성경읽기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셨다. 항상 성경을 읽으실 때는 곁에 연필을 놔두시고 필요할 때 연필 심에 침을 발라 옛날 관주성경 위쪽 절 표시에 괄호를 쳐 놓으시곤 하셨다.

아침 학교 출근은 8시경 중절모를 쓰시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봉천동 시장을 지나 고갯길을 넘어 사당동 총신으로 하셨는데 30여분 거리를 도보로 가셨다. 저녁은 온 식구와 함께 하셨다. 식 후에는 사모님과 대화도 나누시곤 하셨다. 말씀은 천천히 하셨다. 청년 때는 말씀이 빨랐다고 한다. 그런데 은혜 받고 난 다음 말에 실수가 없으려면 말을 적게 하고 생각하면서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시어 말씀을 천천히 하시게 되었다고 한다. 박 박사님은 사모님과 대화하실 때는 꼭 ‘임자’라고 존칭어를 사용하셨다. 사모님께 무슨 부탁을 하실 때는 “임자가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소.”라고 하셨고 부탁한 일을 하셨을 때는 “감사하외다”라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대화 중에 사모님으로부터 사람들의 안 좋은 이야기를 들으실 때는 “사람은 다 그렇고 그러티요.”라고 하시면서 일어나 그 자리를 떠나시곤 하셨다. 나는 박 박사님으로부터 제자들을 나쁘다고 말한 것을 한 번도 들은 일이 없었다. 박 박사님은 참으로 제자들을 사랑하고 아끼셨다. 주말이나 방학 때면 오전, 오후에 책상 앞에 보통 2~3시간씩 앉으셔서 원고 정리와 강의 준비를 하셨다. 박 박사님은 놀랄 만큼 지구력이 뛰어나셨다. 그래서 그 많은 저술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박 박사님 댁 살림은 사모님께서 맡아 하셨고 박 박사님은 전혀 간섭하지 않으셨다.

사모님은 평양 대동군수 따님으로 미모의 여성이셨고 아주 지혜로우시고 쾌활하셨고 유머가 풍부하셨다. 사모님은 중국에서 장개석 총통 부인 송미령 여사와 같은 반에서 공부하셨다고 한다. 새문안교회 강신명 목사님께서는 한국에 3대 여걸이 있는데 박마리아, 박순천, 박순도라고 하셨다고 한다.

사모님은 집에서 성경을 많이 보시어 성경책이 해어질 정도였다. 사모님은 찬송도 좋아하시어 혼자 집에 계실 때는 1장부터 시작해 장을 넘겨가면서 찬송을 부르시곤 하셨다.

그런데 상도동에 사실 때 겨울 방학 때였는데 병약한 둘째 아들 모세씨 문제로 가정에 어려움이 생겼다. 이 때 사모님께서는 박 박사님께 큰 음성으로 “목사님, 가정에 이렇게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원고 정리만 하고 있으면 됩니까! 기도하셔야지요!”라고 하셨다. 이 때 박 박사님은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예, 기도해야디요.”라고 말씀하시고 2층에 올라 가셔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참으로 박 박사님은 겸손하셨다.
 
3. 설교가 박형룡 박사의 설교준비와 설교

박 박사님께서는 일생동안 신학교에서 바른 복음,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설교 준비하실 때도 항상 성경 말씀을 빛나게 하고 예수님을 강조하며, 성도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주며 격려하고 고난에 인내하며 세월을 아끼며 맡은 바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것을 강조하신 것을 보았다.

박 박사님께서 설교 부탁을 받으시면 먼저 설교하실 곳이 어디이며, 대상이 누구인가를 인지하시고 성경본문을 선택하시고 성경을 오래 묵상하시고 설교를 준비하시는 것을 보았다. 원고는 편지지(양면괘지)에 세로글씨로 오래된 만년필로 위에서 아래로 정성껏 써 내려 가셨다. 글씨는 크게 쓰셨는데 명필가이셨다. 그리고 쓰신 원고를 여러 번 읽으시다가 고칠 부분이 있으면 가위로 종이를 오려 고칠 부분 위에 풀로 붙이고 그 위에 곱게 고쳐 쓰셨다. 박 박사님은 설교원고를 작성하시는데 참으로 정성을 기울이셨다. 그리고 설교는 철저히 원고 중심으로 하셨다. 강조할 부분이 있으면 오른 손 주먹을 올렸다 내렸다도 하셨고 또 양손을 들어 호소하기도 하셨다.

박형룡 박사님의 설교는 원고를 읽어 내려가는 설교였지만 그의 진실한 삶과 겸손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 배일사상, 독립정신을 고취했다는 죄목으로 인한 투옥(목포형무소 10개월), 망명생활, 6.25 피난생활 중에 겪은 고난, 해방 이후 밀려들어오는 자유주의 신신학과의 논쟁 등을 이겨 내신 늠름한 모습이 담겨서 그분의 모습만 보고, 잔잔한 톤의 음성만 들어도 감동이요 은혜가 되었다. 왜냐면 그분의 삶이 바로 바른 복음의 설교이셨기 때문이었다.

나는 박 박사님의 설교 준비 하시는 모습을 회고하면서 오늘날 목회자들이 강단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설교하는 것보다 박 박사님처럼 설교 원고만큼은 자신이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친필로 기록한 원고를 강대상 위에 올려놓고 설교하는 것이 훨씬 더 감동적이라고 생각한다.
 
결어

박형룡 박사님의 설교에 대한 평을 들어보면, 노진현 목사는 “나는 박 박사님의 설교에 은혜가 없었던 때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부흥적 웅변은 아니었으나 그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 심장에 부딪혔습니다. 박 박사님께서 원고 없이 하시는 설교를 보지 못했습니다. 별 기교는 없었으나 연세가 높아가면서 한국교회를 위하여, 혹은 신학적 태도가 순수하지 못함을 통감할 때는 눈물겨운 어조로 우리의 심장을 쪼개는 것 같은 감을 주었습니다.”(노진현 목사 회고록 <진실과 증언> P. 174)

정규오 목사는 박형룡 박사에 대해 “나의 신학, 신앙 인격의 모델이시고 대설교가 이시고 인격자이시다”라고 했다. 정문호 목사는 “나는 박형룡 박사님과 같은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중략). 나는 목회와 부흥회를 인도하는 일에 분주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박 박사님이 설교하시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설교의 은혜를 사모했다”라고 했다.

장차남 목사는 “박 박사님 설교는 시의 적절하고 감동을 주었다”라고 했다. 정성구 목사는 “그의 설교는 잘 준비된 원고를 그냥 읽어 내려가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영적으로 뜨거움이 있을 때는 잠시 감정을 억제하면서 침묵하곤 했다. 박형룡 박사가 침묵할 때는 성령의 충만으로 가슴이 뜨거울 때였다.”라고 했다.

실로 박형룡 박사님은 세기적인 인물이시오, 위대한 신학자요, 또 설교가 이셨다. 설교자는 설교 내용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먼저 삶을 통해 설교하고 감동을 주어야 교인들이 설교자를 존경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될 때 설교자의 하나님 말씀 증거를 통해 교인들이 은혜 받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이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단이 이렇게 한국교회의 장자 교단이 된 것은 박형룡 박사님의 존경받는 신앙의 삶, 그리고 성경말씀을 빛내는 영감 있는 설교 그리고 성경대로 믿는 보수신학의 가르침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박형룡 박사님은 한국교회 보수신앙의 아버지이시며 또 오늘날 우리 교단이 세워진 일에 공로자이시며 자랑감이시다. 오늘날 우리 교단의 목회자들이 박형룡 박사님의 가정예배와 감동적인 설교, 말씀의 생활화 신앙, 그리고 개혁주의 보수신학을 굳게 지키고 전파하는 일에 고난을 이겨내시며 일생을 헌신하신 것을 모범으로 삼는다면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우리 교단의 교회들은 더욱 더 큰 부흥이 일어 날 것으로 확신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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