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일 목사(대구 범어교회)

절제의 훈련이 진정한 승리를 만듭니다
넘치는 욕망을 경계하며 겸손으로 무장, 주님과 동행하는 최후의 승자돼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인생은 경주(競走)이다

인생을 두고 왜 경주(競走)라고 했을까요? 약육강식 때문입니다. 약한 동물은 살려고 도망쳤고, 강자는 잡아먹으려고 좇아갑니다. 경주에서 처지면 지는 게 아니라 목숨을 잃습니다. 그래서 경주에서는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고, 문벌 좋은 사람도 그리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우리가 소망을 잃지 않고 세상 경주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 대하여 구약의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10~11)

얼마 전 어느 언론사에서 발표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회 계층 상승에 대한 희망지수가 매우 낮게 나왔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창 희망을 가지고 있어야 할 청소년들과 서민층에서 81%가 계층 상승에 별 기대를 갖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 현실입니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고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희망을 가집니다. 이유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하나님은 보호하시고 승리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희망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썩을 면류관’과 ‘썩지 않을 면류관’

우리나라에서는 승자 독식(獨食)이라 하여, 1등만이 살아남는다는 말을 할 정도로 금메달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 목숨 걸고 경주하고 있습니다. 경주에서 이긴 자는 단 한 사람이다 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주하거나 아니면 아예 포기해 버립니다. 경주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불법도 승자(勝者)에 의해서 정의(正義)로 둔갑할 수 있기에 더욱 그런 현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불법의 승자는 반드시 드러나고 맙니다.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운동선수들이 약물 복용으로 메달을 박탈당하는 사례들이 간혹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름 유명한 학자들과 사회 지도층이 남의 글을 표절하여 들통이 나기도 합니다. 정치인들이 당선만을 생각하면서 불법 선거를 치렀을 때, 결국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쫓겨나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많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환영과 축하도 받았지만, 결국 부끄러운 관을 쓰고 마는 것입니다. 곧 ‘썩어질 면류관’이었던 것입니다.

이 썩어질 면류관은 곧 “향방 없는 것 같이 하는 자”(26절)가 얻은 면류관입니다. ‘향방 없음’은 목적이 분명치 않고, 가치관이 없는, 그저 찔러나 보려는 막무가내 식의 행동입니다. 준비되어 있지 못하거나 어설픈 생각으로 행동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우 속력은 대단합니다. 집착에서 나오는 힘은 일반적인 측정치를 넘어 섭니다. 그러나 속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속력은 오직 힘에 불과하고, 속도는 방향과 목적을 담아 움직이는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려는지 방향이 없다보니 힘은 있어서 움직이는데 우왕좌왕하는 동안 이동해야 할 곳으로 결국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곧 변화와 발전을 이루어 내지 못한 채 힘만 낭비하는 꼴이 됩니다.

잠언에 이런 경구가 있습니다.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잠 21:5) 여기서 ‘조급한 자’는 힘을 함부로 사용하는 자이고, ‘부지런한 자’는 그 힘을 절제하며 필요한 일에 적절히 사용하는 자를 말합니다.

경주할 때 조급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조급하면 에너지만 엄청 소모하고 얻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빈 깡통처럼 소리만 요란하고 별 유익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안식은 조급함을 고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주일을 지킴으로 우리는 자기의 삶의 속도를 재검하게 됩니다.

가는 방향과 속력이 적절한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하루를 주안에서 쉬면서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은총을 경험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되새김하면서 교훈을 얻습니다. 주일은 우리의 인생 경주가 허공을 치지 않도록 지켜주는 날입니다. 주일은 썩지 않는 영원한 면류관을 사모하며 달려가도록 인도합니다.

 
이기려면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

우리 몸의 본능은 탐욕입니다. 탐욕은 썩을 것, 썩지 않을 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탐욕은 어디든 멀리 혹은 많이 자기 영역을 넓히려하는 것입니다. 대신 방향이 없습니다. 그래서 탐욕으로 경주한 것은 나중에 모두 잃고 맙니다. 썩지 않고 허공을 치지 않는 진정한 승자가 되려면 이런 탐욕을 쳐 없애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절제(self control)입니다. 바울은 외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5절)

여기서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는 영어로 “go into strict training”, 곧 매우 엄격한 훈련에 들어간다는 말로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27절)입니다. 메달을 따려는 운동선수는 그 훈련이 매우 강력합니다. 자기 몸을 칩니다. 자기 몸의 자유를 포기합니다. 몸이 요구하는 욕망을 쳐 복종시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주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훈련을 하지 않습니다. 절제 없이 이기려고만 합니다. 이것은 바로 부정 선수입니다. 혹 그가 면류관을 받아도 곧 빼앗길 면류관일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승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런 야망을 빨리 접어야 합니다. 그런 생각 자체를 무서워해야 합니다. 그것은 처음 사정 보다 나중 사정이 더 나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정말 영원하고 진정한 승리자가 되려면 자기 몸을 치며 절제의 훈련을 쌓아가야 합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금생과 내생에 유익”하다고 했습니다.(딤전 4:8) 경건의 연습, 이것이 곧 절제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 연습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경건은 거룩성입니다. 거룩성을 그저 얻으려고 하지 맙시다. 말의 절제, 행동의 절제, 물질의 절제, 관계의 절제에 힘을 씁시다. 절제는 곧 겸손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랑하시나 교만한 자는 밀어내시는 분이십니다.

너무 진지함도, 너무 밝음도 절제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와 다른 사람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너무 깊은 사랑도, 너무 뜨거운 열정도 절제합시다. 그래야 건강한 사랑의 열매를 얻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나의 경주의 목표가 되게 해야 합니다. 주님이 움직이시면 우리도 가고, 주님이 멈추시면 우리도 서야 합니다. 광야의 구름기둥과 불기둥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움직입시다. 그러면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최후의 승자(勝者)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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