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교리 지키며 일관된 목회시스템 가동 … “교훈 크다”

“칼빈 목회신학 토대 보여주었다”
 

▲ 교리적 칼빈이 아닌 목회현장의 근대적 칼빈 연구에 물꼬를 튼 임종구 목사.

<기독교강요>로 개혁주의 근간을 세운 종교개혁자 칼빈의 목회는 어떠했을까? 그동안 신학자 칼빈에 대해서만 부각되다보니 정작 목회자로서의 칼빈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진 바가 없다. 칼빈의 제네바목회백서라 할 수 있는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에서 칼빈의 목회신학을 연구한 책이 최근 출간돼 주목을 받고 있다.

대구에서 교회를 개척해 20년간 목회를 하는 과정에서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역사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임종구 목사(푸른초장교회)가 지은 <칼빈과 제네바 목사회>(부흥과개혁사)가 그것으로,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RCPG)을 연구한 아시아 최초의 연구논문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저자는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에 담긴 교회행정(151건), 공식서신(44건), 고소(36건), 민원(9건), 사건(6건)을 일일이 분석하고 신학적·목회적 의미들을 다루면서 교리적 칼빈이 아닌 제네바에서 실제 목회를 하면서 보여준 목회자 칼빈을 보여주는데 집중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저자와의 일문일답.
 
▲제네바 목사회는 어떤 조직인가.

=제네바 목사회는 매주 금요일에 회합을 가졌다. 칼빈이 이 주간성경연구모임을 진행하고 이끌었다. 이렇게 매주 토론한 성경연구는 후일 칼빈주석의 배경이 된다. 오후에는 신학토론을 가졌는데 목회자에게만 참여가 허락되었고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오전의 회합이 주경신학이라면 오후의 회합은 조직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세 달에 한 번씩 목회자들은 형제애적 견책을 시행하여 서로에게 윤리적인 문제들에 대해 충고하고 점검했다.

이런 일련의 목사회 활동은 교리의 일치를 도모하고 이단을 색출하는 신학검증시스템이 작동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제롬 볼섹과 세르베투스가 제거되고 제네바는 일관된 도시의 신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네바 목사회의 역할과 의미를 말한다면.

=제네바 목사회 회의록을 통해 추적한 목사회는 정통교리의 수호자였다. 특히 칼빈은 제네바에서 28년간 카롤리, 볼섹, 트롤리에, 세르베투스와의 교리논쟁 때문에 네 차례 기소를 당했다. 그러나 칼빈과 제네바 목사회는 정통교리를 지켜내었다. 제네바 목사회는 국가통치이념을 제공했던 신학연구소였다. 여기서 신생 기독교 국가였던 제네바에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와 같은 신학적 토대를 제공했다. 또한 교회의 자유와 독립을 지키기 위한 권징의 시행자였다. 목사회는 시의회와의 갈등 속에서도 교회 고유의 파면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종합목회지원센터 역할도 했다. 제네바목사들은 목사회를 통해서 지원과 통제를 동시에 받았다. 목사 후보생의 교육, 시험, 선방, 연장교육, 임지결정이 목사회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다른 도시로 이거할 때도 목사회에서 추천서를 발행했다.

▲제네바 목사회가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이 있을 것 같다.

=칼빈주의를 말하고, 종교개혁의 정신을 말하면서도 16세기 종교개혁의 귀중한 유산을 놓쳐버린 것이 많은 같다. 제네바 목사회와 비교해 최소 세 가지 정도의 분실항목을 찾을 수 있다.

우선 목회자의 평생교육시스템 가동이다. 제네바의 모든 목회자들은 순서별로 성경을 강해하고 공부했으며, 신학주제 토론으로 교리적 이탈을 막고 교회의 일치를 이루어갔다.

둘째, 제네바의 목사들과 장로들은 매주 목요일 교구의 윤리적, 신앙적 문제를 가진 시민들을 소환하여 목양적 지도를 하여 건강한 권징의 모범을 제시했다.

끝으로, 목회자 윤리시스템이 가동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제네바의 목사들은 석 달마다 서로를 사랑으로 권면하고, 연약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줌으로써 도덕적 문제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고 교회의 건덕을 지키고자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배우고 회복할 점이 많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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